“선배를 잘못 만나서”

20대 초반엔가, 한 PD 경향 활동가로부터 “결국 대학에 들어가서 선배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정파가 결정되는 거다. NL 선배를 만나면 NL이 되는 거고, PD 선배를 만나면 PD가 되는 거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도 분노스러웠고 지금도 분노하게 되는 말이다. 정확히는 아주 역겹다고 생각하는 말이다.

왜냐고? 사람들의 판단 능력을 깔보고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운동에 헌신하는 것을 깔보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그 활동가 한 명만 했던 생각은 아니었나 보다. 최근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홍세화 씨도 2013년에 정확히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어쩌면 그 활동가도 홍세화 씨의 말을 빌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활동가와 홍세화 씨를 포함한 여러 좌파들 사이에서 마치 유행처럼 떠도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한국 진보 진영 내에서는 안목과 의식이 아주 특수한 계기를 통해 형성되고 있어요. 쉽게 말하면 ‘선배 잘못 만난’ 계기라고 할 수 있죠. 그 미성숙의 결과로 2004년 13%의 지지율을 얻던 진보 정당이 4%대까지 추락하는 현상이 나타났어요. 진보 내부에 숭숭 뚫린 구멍들이 드러난 겁니다. 이제 그 빈 자리를 채워넣는 학습의 작업이 필요한 때예요. 자유주의의 전유만으로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든 문제를 분단상황에 대한 논의로 축소시키거나, 여성주의의 테두리 안에서만 고민하는 태도 역시 진보 진영이 처한 난관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성벽을 쌓고 있어요. 자기 인식의 과정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고민하거나 단련하지 않고 스무 살 안팎에 만난 선배가 가져다준 반전을 통해 세상을 배우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범진보 진영의 다수를 민족주의 계열이 점하고 있어요. 노동문제와 계급문제 같은 당면한 현실보다는 분단의 현대사에서 가학과 증오를 먼저 배우게 되는 거지요. 그런 섬세하지 못한 학습이 선배를 따라 정파가 결정되는 구조, 의식화된 자의 우월감, 정파 간 권력 다툼과 맞물려 쌓이면 ‘배제의 장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습 부족했다 진보여 반성하라」 (웨이백머신 사본)

내가 이런 말에 분노하고 역겹게 여기는 까닭은, 어쩌면 내가 굉장히 ‘의식’적으로 내가 활동하는 단체를 ‘선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0여 년간 활동하고 있는 ‘노동자연대’ 에서 활동하기 이전에도 나는 (청소년 인권) 활동가로서 살고자 노력해왔었고, 종종 고백하지만 노동자연대(옛 이름 다함께)를 싫어했었다. 싫어했었던 까닭도 내 (의식적) ‘정치’ 때문이었고, 생각이 바뀐 것도 (의식적) 충돌과 논쟁 덕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만의 다른 궤적을 밟아왔겠지만, 그들도 다들 ‘선택’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단지 “선배를 잘못 만나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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