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s
odds and ends. written down.
- — Claude Opus 5.5가 이 블로그를 읽었다
- — 전자책 리더로 읽는 《노동자 연대》, 한결 집중이 잘 된다
- — 최소 기준만 넘기면 되니까
- — 수신 거부 대신 스팸 처리
- — Claude Opus 5.5가 내 책장을 읽었다
- — 바이브 코딩으로 만든 나만의 앱
- — 허구의 이중 잣대
- — 『좌파 생활』 서평
- — Moondrop Chu II, 2.5만원의 찌릿함
- — 특권층?
- — 도그 휘슬
- — 평양냉면을 너무 미워하지 말았으면
- — 이념적 접착제
- —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자들
- — 《한국일보》의 ‘중도’
- — 누가 돌이킬 수 없게 하는가
- — 한중일, 생김새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 — 한국의 탈종교화는 사실상 탈불교화
- — 반유대주의를 반긴 시온주의
- — ‘젠더 이데올로기’ 논란 수입
- — 멍한 머리와 글루타메이트
- — 국민독서실태조사를 읽으며
- — ‘이리떼’는 누구인가
- — 말장난만 하면 현실이 바뀌나
- — 어디로 터질지 모르는 에너지
- — 계급투쟁으로부터 도피는 참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는구나
- — 100번째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
- — 미완성식탁 (서울 종로구)
- — 『엥겔스와 인간 사회의 기원』 독서 단상
- — 미니말레 뢰스터리&커피바 (서울 서초구)
- —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지구의 파괴다』 독서 단상
-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의 아주 짧은 역사』 서평
- —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서평
- — 난생처음 서울국제도서전
- — 『당신은 하마스를 모른다』 서평
- — 문해력이 왜 필요한지부터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 — 정론지는 正論紙가 아니라 政論紙
-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서평
- —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서평
- —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서평
- — 『영원의 전쟁』 서평
- — 『무함마드: 신의 예언자』 서평
- — 번역은 ‘손실변환’이 아니다
- —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 서평
- — 앱 사용시간을 줄여 주는 ScreenZen
- — ‘연금’이라는 세계관 바로미터
- — 아랍어와 문맹률
- — 교수님 터키어 진도가 너무 빨라요
- — 그냥 쳐 본 시험
- — 역시 책은 마음의 양식?
- — 『재난의 시대 21세기』 서평
- — 『The Headscarf Controversy: Secularism and Freedom of Religion』 서평
- — 『철학의 근본 문제 유물론 대 관념론 : 역사적 갈등』 서평
- — 『대체로 무해한 이슬람 이야기』 서평
- — 『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서평
- — [번역] 대구 이슬람사원 건축 논란: 한국의 이슬람혐오와 종교 자유에 대한 도전에 관한 고찰
- — 『섹스할 권리』 서평
- —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서평
- — 『좌파의 길』 서평
- — 『The Muslims Are Coming!』 읽기 시작
- — 펠로우 오드 그라인더 2세대 버를 생일 선물로 받았다
- —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 서평
- — 『젠더, 만들어진 성』 서평
- —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 서평
- — 『진리를 향한 이정표』 서평
- —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조합 투쟁』·『노동조합 속의 사회주의자들』 서평
- — 『밀레니얼은 왜 가난한가』 서평
- — 후르셰다사마르칸트 (경기 안산시)
- — 원조게장정식 (경기 안산시)
- —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서평
- — 『개미는 왜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투자하는가?』 서평
- —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 — 국민연금 기금 고갈 때문에 보험료 인상은 불가피한가?
- — 『알제리전쟁 1954-1962』 서평
- — 난수의 씨앗
- — “선배를 잘못 만나서”
- — 『ADHD 2.0』 서평
- — 아랍어 재도전
- — 이슬람 혐오에 대해 (제대로) 맞서기?
- — 결코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아랍어
- — 오늘의 아랍어 공부: 잠꼬대로 엉터리 아랍어까지?!
- — 오늘의 아랍어 공부: 이름 앞에 붙는 ‘야’
- — 듀오링고 100일(=아랍어 공부 100일)
- — 『사라진 나의 중국 친구에게』 서평
- — 그럭저럭 괜찮은 대체육
- — 『H마트에서 울다』 서평
- — GMO와 자본주의적 농업
- — 『레닌: 레닌 사상의 종합에 관한 연구』 서평
- — 법무부 앞 이집트 난민 농성
- —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 서평
- — 『타인을 기록하는 마음』 서평
- — 『베르베르 문명』 서평
- — 『트랜스젠더 이슈』 서평
- — 『있지만 없는 아이들』 서평
- —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 —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론』 서평
- — 『우크라이나 전쟁,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각축전』 서평
- — 『팬데믹 1918』 서평
- —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서평
- — 유익한 누룩곰팡이만 골라내는 방법?
- — 오히려 젤렌스키 칭송이 진짜 문제
- —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즌2 감상평
- — 『오인된 정체성』 서평
- — 펠로우 스태그 EKG 전기주전자를 샀다
- —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의미』 서평
- —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이 또 필요하다고?
- — 『이기적 유전자』 서평
- — 외국인보호소 ‘새우꺾기’ 고문을 묻는 모로코인 지인
- — 『포르노랜드』 서평
- — 『이슬람과 유럽 문명의 종말』, 인용 방식이 엉망이고 꾸며낸 자료도 많은 책
- — 알제리 정부의 ‘방화범’ 여론몰이
- — 열린 마음과 마르크스주의
- — 『조현병의 모든 것』 서평
- — 『선택할 자유』 5장을 읽고 소감
- —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서평
- — 『조류독감』 서평
- — “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20대가 바보라 할 수 없지만, 40대를 넘어서도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다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 — 이승민 동지를 추억하며
- — 『선택할 자유』 1장을 읽고 소감
- — 『새로운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정치학 가이드』: 다시 꺼내 읽는 기본
- —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 독성의 상한선이 풀릴 때
- — ‘장애이자 폭력’이 그리도 어려운가?
- — 처벌만 강하게 하면 범죄가 준다는 착각
- — ‘그걸 나한테 왜 알려주는 거지’라는 편견
- — 『누가 백인인가?』 서평
- — “학교 급식 신메뉴 ‘곤충 돈가스’” 뉴스를 보며 느끼는 씁쓸함
- — 강원도 차이나타운, 먹히는 마타도어
- — 근거가 약한 ‘문해력 위기론’
- — 너무나 낮은 수준의 목표로 시작하는 아랍어 공부
- — Dongwook의 로마자 표기
- — 주식을 아무리 사고팔아도 새로운 자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 — ‘이슬람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 — “한국에서 이슬람 테러가 없는 이유”? 엉터리!
- — 스카이라인을 해친다고? 쾰른 이슬람 사원 건축 논란과 이슬람 혐오
- — 김치 동북공정? 기무치 왜곡의 재탕
- — 찌꺼기 같은 합리성
- —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즌1 감상평
- — 내 안의 평평한 지구론자
- — “독일남자 소신발언”? 하나하나 다 틀렸다
- — 이슬람 혐오 때문에 프랑스 유학을 포기한 내 친구
- — 히잡을 벗기겠다는 선민의식
- — 타다의 ‘혁신’
- — ‘실제’ 이슬람 여성의 삶
- — 난민 친구가 체불임금을 받아내는 것을 도우며
- — 타끼야는 지금도 있나
- — 학교 급식, 알레르기와 할랄
- — 히잡을 쓰는 무슬림 여성과 그 가족은 보수적일까?
- —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볼 수 있다면』 서평
- — 꾸란 4장 47절, 얼굴을 지운다?
- — 과학 교양과 지적 겸손
- — 댓글 속 이슬람, 친구들의 이슬람
- — 두 번째 우즈베키스탄 방문
- — 샤리아는 불변하는가
- — 『세상에서 제일 쉬운 만화 경제학』의 마르크스 왜곡
- — 베네수엘라와 노란 조끼, 편향된 요약
- — 에스프레소 머신 3주 사용기
- — 정치 프로젝트로서의 이슬람주의
- — 박가분의 균형을 잃은 메갈리아 비판
- — ‘까트’(식물잎)를 이유로 예멘 난민 불인정 결정, 난민들에게는 죄가 없다
- — 히잡을 쓰지 않는 무슬림 여성들
- — 가장 우익적으로 우익을 막는다는 논리
- — Asian의 번역
- —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서평
- — 무신론과 무교
- — 틀린 근거와 옳은 주장
- — 빠른 에스컬레이터와 두 줄 서기
- — 누구의 호주머니인가
- — 〈청년 마르크스〉 감상평
- — 낙태권과 계급
- — GMO 완전표시제, 어느 편의 이익인가
- — 처벌이 강하면 범죄가 줄까
- — ‘할랄 푸드’ 반대는 ‘동물 복지’를 위한 것인가?
- — 모든 비판은 소련으로 돌아간다
- — 평준화와 대학 점거
- — 『그림으로 읽는 유럽의 난민』 서평
- — 영어가 늘었다는 광고는 왜 없을까
- — 히잡과 맨스플레인
- — 스시는 되고 망년회는 안 되는 이유
- — 눈을 싫어하는 이유
- — 한글과 한국어
- — 찜찜한 한 표
- — 기계가 아니라 소유의 문제
- — 나도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았구나
- — 〈캐롤〉 감상평
- — 김밥과 노리마키
- — 보이지 않는 사람들
- — 그리스 경제위기, 복지 탓이 아니다
- — 샤를리 엡도, ‘그림으로 그렸을 뿐’?
- — 환풍구의 안전 기준
- —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이
- — 다리를 건너지 않는 부산 버스
- — 집에서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마시기 위한 팁
- — 맛있는 커피를 가려내기 위한 나의 기준 혹은 편견
- — 투표와 투쟁
- — 대학 서열 철폐, 냉소가 아니라 압력이 필요하다
- — 〈굿바이 레닌〉 감상평
- — 〈시선 1318〉 감상평
- — 〈항해자〉 감상평
- — 〈우리의 환대〉 감상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