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자유』 5장을 읽고 소감

aladin.co.kr 선택할 자유 | 자유주의 시리즈 55 | 밀턴 프리드먼

dongwook.org 『⁠선택할 자유』 1장을 읽고 소감

『⁠선택할 자유』 5장 ‘빗나간 평등’은 ‘자유가 있어야 평등도 있다’는 흔해빠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주절거리는 내용이다.

프리드먼은 이 장에서 평등을 두 가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으로 나눈 뒤 전자는 자유와 양립할 수 있으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먼은 앞선 장에서도 계속 그랬듯 곧이어 자가당착에 빠지는데, 사람마다 (자산, 능력 등) 출발선이 다르므로 기회의 평등 또한 완벽히 보장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출발선을 같게 만드는 것은 어떨까? 프리드먼에 따르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는 거겠네요, 이 사람아. 독자를 바보 멍청이로 보는 건가….

그런데 이걸 지적하고 넘어가자.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는 말만큼 사실이 아닌데 아무 의심 없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헛소리도 없다. 마르크스가 도대체 어디에서 ‘결과의 평등’을 이야기했는가?

마르크스가 한 말 중 ‘결과의 평등’ 어쩌고와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고르자면 아마 「⁠고타 강령 비판」에서 한 이야기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글에서 사회 변혁의 이행 초기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배분 받으며, 발전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선택할 자유』 5장에서 프리드먼도 마르크스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을 언급하며 이를 ‘결과의 평등’과 연결시킨다.

그러고는 웃기게도, 프리드먼은 소련에서는 고위 관료들은 수많은 특권을 누리는 반면 노동자들은 가난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맞다, 이는 사실이다. 그러면 소련에는 ‘결과의 평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결론으로 도출돼야 한다. 그런데 프리드먼은 ‘결과의 평등’이 이뤄질 수 없는 근거로 소련을 들고 있다. 이건 바꿔 말하면 ‘이뤄지지 않았으니 이뤄질 수 없다’는 뜻이다. 순환논리이고, 순환논리는 논리가 아니다. 초보적인 논리학 문제다.

물론 프리드먼의 주장을 선의로 해석하자면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면 역설적으로 결과의 평등을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의 뒷받침 근거로 소련을 가져올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러려면 ‘기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결과의 평등도 가져온다’ 정도의 주장을 해야 한다. 그래야 논리적 일관성을 갖출 수 있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결과의 평등’은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물론, ‘기회의 평등’조차 이내 갖다 버린다. 출발선을 같게 만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프리드먼은 ‘기회의 평등’이든 ‘결과의 평등’이든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면 도대체 소련 이야기가 나올 까닭이 무엇인가? 소련에는 ‘결과의 평등’도 ‘기회의 평등’도 없었다. 그러면 적어도 ‘평등’ 면에서는 소련과 프리드먼은 같은 편에 서 있는 셈이다. 도대체 뭐가 빗나갔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5장 제목은 ‘빗나간 평등’이 아니라 ‘평등은 이뤄질 수 없다’가 돼야 정직할 것이다.

그런데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회였다. 물론 소련은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자처하는 것만으로 그것이 되는 게 가능하다면, 나는 오늘부터 정우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사회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 이 글에서 길게 쓸 수는 없다. 아래 글들을 참고하면 되겠다.

ws.or.kr 옛 소련 블록은 사회주의가 아닌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ws.or.kr 국가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다시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비판」에서 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마르크스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되는 사회를 언급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사회 변혁의 이행 초기에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배분” 받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별로 주목받지 않는다. 아니, 흔한 통념에 따르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배분 받는 것은 자본주의 아닌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배분 받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통제 여부에 따라 배분 받는다. 그래서 능력주의는 자본주의(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지만, 정작 능력주의조차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그렇기에 허위의식, 즉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을 그 사회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마이클 샌델의 지적(“수백만 달러를 받는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받던 시대에 태어난다면 어땠을까?”)은 물론 옳지만, 그렇다면 그 ‘능력’에 따른 배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이뤄지고 있기는 한 것인지를 지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편으로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배분 받는 것은 여전히 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원리는 “암묵적으로 개인의 불평등한 소질을 승인하며, 따라서 노동자의 실행 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승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원리와 실제가 이제는 서로 머리채를 쥐고 싸우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러하다.” 비록 자본주의에서 능력주의가 온전히 실현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원리와 실제가 서로 머리채를 쥐고 싸우는 것),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적 원리이기는 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배분”되는 사회를 언급했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와 같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 평등한 권리에는 아직도 부르주아적 제한이 들러붙어 있다. 생산자의 권리는 그의 노동 제공에 비례한다; 평등의 요체는, 평등한 척도인 노동으로 측정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서, 동일한 시간에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거나 더 많은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이 척도 노릇을 하려면 연장이나 강도로 볼 때 일정한 것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척도이기를 중지한다. 이러한 평등한 권리는 불평등한 노동에 대해서는 불평등한 권리이다. 이것은 어떠한 계급 차이도 승인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각각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암묵적으로 개인의 불평등한 소질을 승인하며, 따라서 노동자의 실행 능력을 자연적 특권으로 승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권리가 다 그렇듯이 내용상 불평등의 권리이다. 그 권리의 요체는 본성상, 오직 동일한 척도의 적용에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한 개인들(만일 그들이 불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개인이 아닐 것이다)이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동일한 관점 아래 놓이는 한에서, 즉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만 파악되는 한에서이며, 예컨대 이 경우에 그들은 노동자로서만 간주되고 그들에게서 그 이상의 것은 보지 않으며 다른 모든 것들은 도외시된다. 나아가: 어떤 노동자는 결혼하였는데, 다른 노동자는 결혼하지 않았다; 어떤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보다 자식이 많다, 등등. 그러므로 동일한 노동을 실행하고 따라서 사회적 소비 기금에 대해 동일한 몫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어떤 사람은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으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하게 된다, 등등. 이러한 모든 폐단을 피하기 위해서는, 권리는 평등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폐단은,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불가피한 것이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생활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차적인 생활 욕구로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분천이 흘러 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마르크스주의가 ‘결과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왜 사실이 아닌지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분배 문제(결과)에 중점을 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이 이야기를 했다! (이 글의 제목이 「⁠고타 강령 비판」임을 염두에 두라. ‘고타 강령’을 비판하는 글이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내가 한편으로는 “온전한 노동 수익”을, 다른 한편으로는 “평등한 권리”와 “공정한 분배”를 장황하게 다룬 것은, 한편으로는, 일정한 시기에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으나 지금은 낡아빠진 잡소리가 되어 버린 표상들을 다시 교리로서 우리 당에 강요하려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에 가져올 때는 고생이 많았으나 뿌리를 박은 현실주의적 파악을 다시 민주주의자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 익숙한 이데올로기적 권리설이나 다른 속임수를 통해 왜곡하려는 것이 얼마나 나쁜 짓인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이제까지 개진한 것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소비 수단의 그때 그때의 분배는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그런데 생산 조건의 분배는 생산 방식 자체의 특성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물적 생산 조건들은 자본 소유와 토지 소유의 형태로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배분되는 반면에 대중은 인적 생산 조건인 노동력의 소유자일 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생산의 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 수단의 분배가 저절로 생겨난다. 물적 생산 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가 되면,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 수단의 분배가 생겨난다.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 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진정한 관계가 이미 오래 전에 해명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뒤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마르크스주의는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이 생산수단을 통제할 것을 (낮은 단계로서) 핵심 목표로 한다. 분배가 아니라 생산이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다음을 짧게 지적하고 글을 마치겠다.

위에서 마르크스의 글을 길게 인용한 데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추상적 윤리를 설교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윤리 관념과 규범은 역사적이다. 윤리 규범은 사회마다 다르며, 계급이나 사회집단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프리드먼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그 전제부터 틀렸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 물음들을 먼저 던질 것이다. 누구의 자유인가? 누구의 평등인가? 어느 생산양식에서? 어느 계급을 위한?

봉건제 하에서 부르주아지는 봉건 귀족에게 종속돼 있었다. 당시에 부르주아지는 이미 다른 계급을 착취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수적으로는 소수였다. 그래서 봉건 귀족에 맞선 자신들의 투쟁에 다른 사회 세력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봉건 귀족을 제외한 사회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인 것처럼 행세했다. 그들은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 당하는 계급 사이의 이해관계 갈등을 은폐하려고 “자유, 평등, 박애” 같은 추상적이고 보편 타당해 보이는 수사들을 동원했다.

ws.or.kr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노동계급

프리드먼이 말하는 자유는 착취하는 계급의 자유일 뿐이다. 이를 논하지 않는다면,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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