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자유』 1장을 읽고 소감

aladin.co.kr 선택할 자유 | 자유주의 시리즈 55 | 밀턴 프리드먼

어제 아는 분한테서 밀턴 프리드먼이 쓴 『⁠선택할 자유』를 빌렸다.

책 자체에 크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분이 어떤 생각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했다. 전에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있는 것도 봤었기 때문에, 그분이 정치적으로 우파적일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나 우파적인지는 대화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고, 어쨌든 정치적 관심도가 (우파적이든 좌파적이든) 꽤나 높은 사람일 것 같아서 (정치적)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사실 좀 더 나아가보자면, 정치적으로 동의하기에 『⁠선택할 자유』와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예컨대 나는 밀턴 프리드먼과 리처드 도킨스를 경멸하지만, 그들의 저작을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다. (『⁠선택할 자유』와 『⁠이기적 유전자』는 아니고, 『⁠자본주의와 자유』와 『⁠만들어진 신』, 『⁠지상 최대의 쇼』를 읽어봤다.)

나처럼 비판적으로 읽고 있을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분이 그 책들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는 게 아니더라도, 『⁠선택할 자유』와 『⁠이기적 유전자』는 내가 아직 읽어보지 않은 책이기에 책을 빌려서 비판적으로 읽어보겠다는 관심도 조금은 있었다.

아쉽게도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별로 이야기를 안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서 그리 길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선택할 자유』는 윤석열이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언급한 책이기에 대선을 전후로 ‘돈을 벌 인사이트’ 같은 것을 찾고자 읽기 시작했다고 했고, 『⁠이기적 유전자』는 원래 자신은 인문사회보다는 과학 책을 더 좋아해서 읽고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없다고 했다.

내가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는 예전에 읽어봤다고 이야기를 하니, “자본주의 싫어하지 않으시냐”라고 농담을 던지길래 “잘 싫어하려면 잘 알아야죠”라고 나도 농담을 했다. 뒤이어 “레닌, 스탈린 이런 책 주로 읽으시는 것 같던데.”라고 하길래 “레닌은 좋아하지만 스탈린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짧게 답했다. 그러자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라고 여러 이름을 읊길래, “앞의 둘, 마르크스와 레닌은 좋아하지만, 뒤의 셋은 좋아하지도 않고 앞의 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뒤의 셋은 내가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하고 덧붙였다. “뭐, 학창시절에는 그들이 다 관련이 있다고 배우니까 그렇게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잘 모른다.” 하고 대화를 닫으려 하길래 길게 이야기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 같아 나도 굳이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빌려온 『⁠선택할 자유』를 오늘 잠깐 읽어봤다. 동명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책으로 보강해서 출판한 것이라서 그런지 읽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직 1장만 읽었지만, 소감을 써보자.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는 두 번 읽어봤었는데, 한 번은 고등학생 시절이었고 다른 한 번은 내가 스물두 살쯤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 즉 ‘사회민주주의’가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거기에 내가 당시 활동하던 단체의 영향으로 연성 아나키즘적 경향을 모순적으로 함께 갖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비판적으로 읽기가 만만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그 까닭은 자명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갖다 버리면서 그 대체물로 가져온 ‘케인스주의’는 사실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케인스주의’를 갖고는 프리드먼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실제로 케인스주의자들은 임금의 ‘경직성’ 때문에 실업률이 어떤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인플레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 — 이 개념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필립스 곡선’인데, 이 곡선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사이에 ‘반비례’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 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러한 견해에서 한 발만 더 나아가면 ‘자연 실업률’ 가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실업률의 평균 수준이 올라간다면 그것은 케인스 자신이 언급했던 체제의 비합리성 때문이 아니라 ‘노동 시장의 경직성’이 ‘자연 실업률’을 높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이게 된다.

케인스 이전의 낡은 정설을 고수하는 통화주의와 ‘정설’ 케인스주의 사이의 차이점은 근본적 분석의 차이가 아니라 공유하는 모델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하는 기술적 차이만 남게 됐다. 통화주의 최고의 설교자인 프리드먼조차 케인스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칭송했으며, 통화주의와 정설 케인스주의의 차이는 경제 모델 자체가 아니라 그 내부의 중요한 세부 사항들(공개시장조작 정책으로 화폐 공급을 통제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차라고 말했다.

케인스주의자들이 통화주의자들과 똑같은 기본적 경제 모델을 공유했다는 사실 때문에, 1970년대 중반에 장기 호황이 끝나고 새로운 위기의 시대가 시작됐을 때 골수 ‘정설’ 케인스주의자들이 스승의 가르침에서 핵심 요소들을 쉽게 내던져 버릴 수 있었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그 경제 모델에 대한 한 가지 기술적 해석을 다른 해석으로 바꾸는 것과 치솟는 실업률에 대해 임금과 복지비를 삭감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뿐이었다.

크리스 하먼, 『⁠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 65-67쪽

이후 나는 스물한 살 무렵에 사회민주주의(와 연성 아나키즘)를 버리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아직 그리 익숙하지 않았던 스물두 살 때조차, 다시 읽은 『⁠자본주의와 자유』는 고등학생 때만큼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시 나는 『⁠자본주의와 자유』를 다시 읽으면서 프리드먼이 ‘몽상가 아니면 사기꾼, 아마도 둘 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선택할 자유』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여전하다.

간단한 역사적 사실부터 지적하자. 위에 인용한 크리스 하먼의 설명처럼 케인스주의는 1970년대 위기에 전혀 대처할 수 없었지만, 이후 프리드먼의 통화주의(와 이런저런 신자유주의 조류들)도 위기에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지지자들이 통화주의로 몰려갔지만 통화주의의 위기 대처 능력도 케인스주의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어쨌든 통화주의는 1930년대까지 부르주아 경제학을 지배했던 신고전학파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신고전학파가 양차 대전 사이의 전례 없이 심각했던 불황을 설명할 수 없었듯이, 통화주의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위기에 대처하는 고사하고 이를 설명할 수조차 없었다. 영국에서 통화주의자 하우가 1979년 정부 예산을 편성한 뒤로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갑절이 됐고 1984년의 산업 생산량은 11년 전보다 15퍼센트나 하락했다. 통화주의 정책들은 통화 공급조차 통제하지 못했다. 가장 광의의 통화량(경제학자들이 M3라고 부른 것)이 6~10퍼센트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1982년에는 14.5퍼센트나 증가했다. 통화주의 정책은 지역 산업을 대거 파괴했고, 1980년대 초의 위기를 가중시켰으며, 1990년대에 벌어진 또 다른 위기의 토대를 놓았다.

크리스 하먼, 『⁠좀비 자본주의』, 256쪽

『⁠선택할 자유』는 1980년에 나온 책인데, 한국어 번역판에는 1990년판 서문이 함께 달려 있다. 여기서 프리드먼은 뻔뻔하기 그지없게 1980년대 통화주의의 처참한 실패는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제안한 정책이 충분히 실현되지 않아서 문제라는 식으로 말한다. 물론 이후로도 이러한 뻔뻔한 태도는 프리드먼과 그의 제자들이 공유하던 것이었다. 2008년 경제가 폭락하기 직전까지도.

2007년 샴페인으로 건배하는 경제학자들과, 2008년 경제가 무너진 뒤 얼굴을 감싸 쥔 인물들을 그린 흑백 만화
올리버 블랜차드(IMF 수석 경제 연구원 - 왼쪽), 벤 버냉키(미 연준 의장 - 가운데), 로버트 루카스(시카고대학교 교수, 밀턴 프리드먼의 수제자로 현재 주류 경제학의 대부 - 오른쪽)는 경제 상황이 매우 좋다고 생각했다. … 경제가 폭락하기 전까지는.
ⓒ출처: 폴 크루그먼, 「⁠경제학자들은 어떻게 그리도 틀릴 수 있었지?」, 《⁠뉴욕타임스》(2009.9.2).

(물론 밀턴 프리드먼 본인은 편리하게도 2006년에 죽었다.)

사실 이는 ‘통화주의자’ 프리드먼과 그의 제자들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주류 경제학의 역사를 보면 이것이 과연 정직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그렇지만 많은 주류 경제 이론들은 다른 방향으로 옮겨 갔다. 1930년대 하이에크의 주장을 매우 많이 받아들인 ‘새고전학파’new classical school는 통화주의가 국가의 화폐시장 개입을 내버려 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며 영향력을 획득했다. 이들은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프리드먼도 정부가 나서서 화폐 공급을 조절하라고 촉구함으로써 케인스와 똑같은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어찌 보면 프리드먼도 ‘케인스주의자’였다는 것이다. ‘합리적 기대’ 때문에 기업들이 항상 정부 개입의 효과를 미리 약화시키다 보니, 국가 개입으로도 기업의 행동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화폐 공급을 조절하는 정책은, 적자재정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공급과 수요가 서로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을 방해한다. “호황과 불황은 중앙은행의 기만적 행위 탓”이라고 이들은 주장했다. 심각한 국제적 경기 침체를 세 번이나 겪었는데도 자유방임 경제의 불안정성과 비합리성을 부인한 새고전학파가 지적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학술 경제학이 대부분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크리스 하먼, 『⁠좀비 자본주의』, 256-257쪽

크리스 하먼이 「⁠신자유주의를 이론화하기」라는 글에서 지적했듯 어떤 이데올로기의 주장과 그 지지자들이 실제 하는 행동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둘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점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를 비롯해 온갖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실제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이라고 지적한) 이윤율 저하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이었고, 여기서 핵심은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율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실업과 실질임금 하락, 복지 삭감 등으로 고통을 겪어왔다. 신자유주의는 그 폭력적 과정을 온갖 방식으로 합리화한 이데올로기다.

밀턴 프리드먼은 그런 점에서 공상가이자 사기꾼 둘 다라고 할 수 있다. 밀턴 프리드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계급, 그리고 언론과 대학의 요직을 차지한 지배계급의 충복들에게 위안이” 되는 한, 그의 제안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고 실제 ‘경제를 살리는’ 데 처참하게 실패하든 말든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의 공상을 계속 풀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위기 극복의 핵심은 착취율 증대에 있다는 게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본질이고, 그런 점에서 프리드먼의 공상적 주장이 가장 강력한 반향을 일으키는 분야가 ‘노동조합’과 ‘최저임금’이라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온갖 우파 신문에서 프리드먼의 주장 중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얻는 이익은 기본적으로 다른 노동자들의 희생에 의한 것’(『⁠선택할 자유』 301쪽), ‘최저임금은 저소득층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피해를 입히는 것’(306쪽) 따위의 주장에 특히 열광하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프리드먼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사기꾼이기도 하다.

따라서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은 그 자체로는 그리 보잘것이 없다. 통화주의라는 발상 자체는 역사가 오래됐고, 마르크스도 이미 『⁠자본론』 3권에서 갈가리 논파한 바 있다. 세상은 돈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산 현장에서의 가치 창출, 즉 노동으로 움직인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현대화폐론(MMT)을 비판하며 한 다음 지적은 통화주의 비판에도 유효하다.

첫째, 현대화폐론은 국가가 화폐를 창출한다는 생각을 주류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공유하고 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신자유주의자들은 화폐가 너무 많아지면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위협이 있다고 보지만, 현대화폐론 지지자들은 화폐를 충분히 창출하면 완전 고용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전제 자체가 틀렸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갈수록 신용 체계를 통해 화폐가 창출되게 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은행에서 대출이나 초과 인출 등이 있을 때 화폐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케인스 자신뿐 아니라 니콜라스 칼도어를 비롯한 케인스의 가장 뛰어난 후예들도 통화 공급이 아닌 통화 수요가 중요한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보자. 노동자와 자본가는 각각 소비와 투자에 쓸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돈을 빌린다. 이렇게 화폐가 창출되는 과정을 승인하는 주체는 바로 국가다. 하지만 국가는 결코 화폐 창출을 통제하지 못한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 정부는 1980년대에 화폐 공급을 통제하려 애썼지만 완전히 실패했다.

ws.or.kr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현대화폐론 비판: 돈만 찍어 내면 만사형통일까?

이제 『⁠선택할 자유』 1장에 국한한 소감을 적어보자. 1장에서 프리드먼은 ‘시장의 위력’을 찬양하며 시장에 개입하려는 온갖 시도들이 오히려 나쁜 결과만을 갖고 온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케인스주의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패가 주된 논거다.

위에서 인용한 크리스 하먼,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이 속해 있는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은 ‘현실 사회주의’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본주의의 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라는 주장을 1940년대부터 발전시켜왔다는 점을 짧게 언급해두고자 한다. 국제사회주의경향은 소련이 경제적으로 실패하던 1970년대 훨씬 이전부터, 시장자본주의 옹호자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1940년대에 이미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분석하고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를 모토로 활동해왔다. 소련이 경제적으로 성공했든 실패했든 상관없이 소련은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체제였고, 이 글에서 길게 쓰기는 어렵지만 그게 내가 그분에게 “마르크스와 레닌은 좋아하지만, 뒤의 셋[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은 좋아하지도 않고 앞의 둘과 전혀 관련이 없는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뒤의 셋은 내가 반대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 까닭이기도 하다.

아무튼 프리드먼은 1장에서 계획과 자유방임을 대립시키며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를 찬양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조차 계획은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다. 박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개별 기업들은 매년, 매분기, 매달, 심지어 매일매일의 계획을 세우고 운영해 왔다. 그렇다면, 왜 이윤 확보를 위한 개별 기업들의 계획을 전 사회적 필요에 따른 계획으로 대체할 수 없단 말인가?

이런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계획 조처들은 과거 소련이나 북한의 계획경제와는 다르다. 소수 특권을 두고 관료들이 권력을 독점해서, 인민은 굶주리는 데 미국·남한과의 경쟁을 위해 미사일·핵무기에 우선 투자하는 것은 관료적 지령경제이지 민주적 계획경제가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에 바탕을 두고 인류의 필요를 위해 생산·분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 선출권뿐만 아니라, 소환권이 실질적으로 대중에게 주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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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별 기업에서 ‘계획’이 없다면 그 기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상품을 소수 기업이 생산하고, 그 개별 기업 내에서는 철저한 ‘계획’이 이뤄진다. 프리드먼은 “요즘의 자동차[는] 재화를 교환하는 자유시장의 산물”(49쪽)이라고 지나가듯 언급하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오늘날 자동차 생산은 (개별 기업 정도가 아니라)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사이의 촘촘한 네트워크로 ‘계획’되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 ‘계획’은 1970년대부터 적용된 적시생산(JIT) 시스템으로 인해 최대한 효율적일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 ‘계획’이 언제나 성공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계획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그 ‘계획’이 실은 계획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실제 필요와는 상관이 없는) ‘지령’이라는 데 있다.

아주 흥미롭게도, 프리드먼은 1장에서 “계획”과 “지시”(지령)를 아무런 구분 없이 혼용해서 쓰고 있다. 여기에 프리드먼의 ‘계획경제’ 비판이 갖는 약점의 핵심이 있다.

국제사회주의경향의 창시자 토니 클리프는 1963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적이 있다.

만약 우리가 계획경제라는 말을 단일한 리듬으로 모든 구성 요소들이 조정되고 규제되기 때문에 [구성 요소 간] 알력이 최소화되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결정에서 예측이 주된 요인인 경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러시아의 경제는 결코 계획경제가 아니다. 진정한 계획 대신 정부의 지령이라는 경직된 방법이 그 정부의 결정과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내부의 결함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 계획경제가 아니라 관료주의적 지령 경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동유럽의 대변동」에서 재인용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사회주의의 제1원리로 삼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고 정수다.

흔히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와 동일시된다. 미래의 사회주의는 당연히 계획경제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계획경제’가 사회주의는 아니다.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없는 계획은 진정한 계획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소련의 경제는 결코 계획경제가 아니라 “지령 경제”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밀턴 프리드먼이 학자들 사이의 협조를 ‘계획’에 대한 반대 사례로 든 것은 심각한 자충수다.

어떤 학문이건 학문내용의 성장은 직접적으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터나 넓은 의미의 시장을 꼭 닮았다. 학자들은 서로 유리하기 때문에 협조한다. 다른 학자의 연구업적에서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교환한다. 말로 토의하기도 하고, 출판되기 전의 초고를 돌리기도 하며, 또는 학술전문지에 게재하거나 책으로 출판한다. 시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협조는 세계적인 것이다. 시장에서의 금전적인 보수 대신에 학계에서는 다른 학자들로부터 인정을 얻거나 존경을 얻는다. 그러한 존경심을 얻어내거나 경쟁자들에 의해 자신의 연구가 받아들여질 것을 원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과학적으로 효율적인 연구 방향을 찾게된다. 학자가 다른 학자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그 위에 새로운 성과를 만드는 과정에서 학계전체로서는 개개인 학자의 연구를 합친 것 이상의 성과를 낳는 것이며 한 학자의 연구가 보다 큰 발전의 발판이 된다 하겠다. 요즈음의 자동차가 재화를 교환하는 자유시장의 산물인 것처럼 현대물리학은 아이디어의 교환이라는 자유시장의 산물인 것이다. 물리학에서도 특히 최근에 정부의 간섭이나 역할이 물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고 있다.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지원한다든지 실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연구방향을 제시해주는 등등의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2차적인 것이다. 정말로 아이러니한 것은 중앙집권적인 경제계획을 주장하는 많은 계획론자들조차도 과학정책에서만은 정부의 간섭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는 점을 강조할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탐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발전이 있어야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연구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이를 요구하는 행위가 또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매우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 49쪽

사실 이러한 ‘협조’야말로 진정한 계획의 가능성을 힐끗 보여준다. 그 협조가 “시장에서의 금전적인 보수” 때문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프리드먼은 자신이 모순에 빠져 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정말이지 의문이다.

오히려 학계에서 “정부의 간섭”이야말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은 맹목적이다 보니, 장기적 ‘이익’을 고려하기가 쉽지 않다. 각국 정부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데 관심이 많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당장의 관심사 때문에 “연구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이를 요구하는 … 위험한” 행위를 하게 된다.

게다가 오늘날 대학의 기업화로 학계는 기업들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게 됐는데, ‘정부의 간섭’이 아니라 ‘기업의 간섭’으로 단어를 바꿔도 똑같이 그 비판이 적용된다는 점에서도 프리드먼의 주장은 모순에 빠져 있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은 정부보다 훨씬 더 단기적 이익에 관심을 둬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학계가 겪는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짧게 쓰려 했는데 너무 길어졌다.

윤석열이 『⁠선택할 자유』가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 생각하든 말든 나는 별 관심이 없지만, 그분이 ‘돈을 벌 인사이트’(물론 그런 인사이트는 이 책에 전혀 없다)를 찾는 이상으로 넘어서 이 책의 반쯤 공상, 반쯤 사기인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좀 슬플 것 같다. 윤석열은 지배계급의 일원이고, 그분은 노동계급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이 자신의 직업을 먹고 사는 문제와는 무관하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지배계급이야 프리드먼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위안’을 주며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정당화하기에, 그의 이데올로기가 현실과 맞든 안 맞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그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심각하게 속이는 일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과도한” 정부 지출로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설 자리를 잃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진실과 정반대이다.

진정으로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은 착취를 통해 부를 훔치는 부자들이다.

ws.or.kr 신자유주의는 종식되는가?


2021년 7월 20일에 추가:

dongwook.org 『⁠선택할 자유』 5장을 읽고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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