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민 동지를 추억하며
일기에 적을 만한 일이 이러저러하게 많았던 하루였지만, 방금 오늘이 이승민 동지가 세상을 떠난 지 2주기가 되는 날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만큼 일기에 적고 싶은 이야기는 없을 것 같다. 이승민 동지를 추억하다가 눈물을 닦고 일기를 쓴다.
2011년에 이승민 동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그는 나에게 ‘고참’ 동지였다. 그가 중학생 때 이미 남한 국제사회주의자들(ISSK)을 만났고 고등학생 때 ‘유배’ 간 뉴질랜드에서조차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뉴질랜드 조직을 만나 활동했기에, 그의 나이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고참’이라는 사실은 한참이 지난 수년 후에야 알았지만 말이다.
2016년 무렵 내가 책갈피 출판사에서 함께 할지를 고민하며 번역과 편집 공부를 할 때, 이승민 동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전업 활동가로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던 무렵이었는데, 이승민 동지가 담백하면서도 힘 있는 조언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비록 내가 그 조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후 2018년에서야 나는 책갈피 출판사에서 이승민 동지와 함께 했는데, 그해 여름에 그가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오래 함께하지는 못했다.
장호종이 쓴 조사와 최일붕이 쓴 추모글을 다시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30년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노동자연대의 최고참 회원답게 그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통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고인은 박근혜 퇴진 운동 당시 신문을 판매하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속 신문에는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구호가 쓰여 있습니다. 당시 그녀는 하루에만 그 신문을 400부나 팔았습니다. 평소 책 몇 권도 무거워하던 약골이었지만 신문 200부를 들고 나가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려 애썼습니다.
촛불 투쟁을 기록한 한 사진책에도 그녀의 사진이, 영국 사회주의자들의 신문에도 그녀의 신문 판매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기억되길 바랐을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잊힐까 걱정한다고 합니다. 그녀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녀를 기억해 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가 평생을 바친 꿈을 이어받는 것일 것입니다. 오랜 금식 끝에 사과 주스 한 모금을 마시고는 “너무 좋다”고 하던 그 표정이 잊히질 않습니다.
ws.or.kr
조사: 이승민(1976~2019) 동지를 기리며
기독교인인 호스피스 의사분은 이승민 환자가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곳에서 승민이 너무도 담담하고 의연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어서였다고 했다.
분명히 승민은 사망 때나, 무기한의 미래에 그리스도 재림 때 자기의 몸이 부활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는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였다.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그는 삶을 소중하게 여겼고, 삶의 의미를 추구했다. 그가 뉴질랜드 탈출 후 한국에 와서 했던 말이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우리가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은 있는 법이잖아요.”
43살밖에 안 된 젊은 여성이 건재하다면 그녀가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많을 것이다. 클라라의 부재로 우리는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클라라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면, 클라라의 죽음도 그녀의 삶만큼 소중하고 의미 있을 것이다.
이승민 동지를 추억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지금 나는 “할 수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성실히 하며 살고 있는 걸까.
이승민 동지가 그랬듯,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로서, 삶이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삶을 소중하게 여기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