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20대가 바보라 할 수 없지만, 40대를 넘어서도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다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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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잠금해제] 청년과 마르크스 / 박가분
20대에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보이고 40대에 마르크스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도 바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는 이 역시 옛말이다. 20대에 마르크스주의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제 드물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나는 공감과 연민, 양심의 고통만으로는 어른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20대에 형성해야 할 중요한 미덕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마르크스 외에도 그것을 함양할 방법은 많다. 오히려 마르크스를 읽는 요점은 사회적 문제를 이성적으로 고민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기에는 어느 때보다 타인의 불평등, 빈곤, 사회적 위기에 민감하다. 그러나 청년들이 마르크스를 통해 입문해야 할 물음은 다른 것이다. ‘불평등을 계급과 무관하게, 빈곤을 경제적 착취와 무관하게, 위기를 자본축적과 분리해서 다룰 수 있는가?’
20대에 사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오히려 20대에 마르크스를 반드시 읽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20대에는 자본 자체를 건드리지 않고서 사회문제에 대한 개혁주의적/온정주의적 접근을 취할 수 있다. 오히려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시점은 ‘공감, 연민, 양심의 고통’만으로 아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의 장벽에 이미 부딪혀 본 어른이 되었을 때이다. 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20대가 바보라 할 수 없지만, 40대를 넘어서도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다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자본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 시절에 타인에 대해 가졌던 아름다운 연민의식이 소시민적인 자기연민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20대에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보이고 40대에 마르크스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해도 바보”라는 말이 유명한데(유명한 말이 다 그렇듯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칼 포퍼, 무솔리니 등 다양한 유명 인사들이 출처로 떠돌아다닌다), 이 말을 뒤집어 설득력 있게 제시한 글을 읽었던 기억이 요새 머릿속에서 한참 맴돌았다. 하지만 누가 썼던 글인지 계속 못 찾다가, 어제서야 우연히 찾았다. 그런데 에라, 박가분이네.
2012년 글이니 박가분은 이때 스물여섯이었을 테다. 이때도 박가분은 결코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30대가 될 무렵 그는 마르크스에 대한 약간의 관심조차 완전히 집어던져 버렸다. 그렇다면 그가 2012년에 쓴 글은 틀린 것일까? 역시 옛말이 맞는 것일까? 20대에는 마르크스주의에 빠지지 않았다면 바보겠지만, 20대를 벗어나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도 함께 벗어나지 못한다면 바보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40대를 살아보지도 않았고 이제 막 30대가 된 것일 뿐이지만, 이렇게 단언을 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마르크스주의를 청년의 치기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간 본성’ 어쩌고 하는 몰역사적인 조야한 형이상학으로 도피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20대에서 40대로 고작 20년 나이만 더 먹었다고 성숙해졌을 리 만무하다.
나는 청년들이 마르크스를 통해 입문해야 할 물음에 다음을 추가하고 싶다. ‘인간 본성’을 특정 사회의 생산양식과 무관하게 다룰 수 있는가?
성악설, 성선설 등 인간 본성에 대한 숱한 설명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봤다. 인간 본성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동해 온 사회관계의 총체다.
「마르크스주의와 소외」, ws.or.kr
박가분은 자신이 마르크스에 대한 약간의 관심조차 집어던진 까닭을 2016년에 설명한 글인 어느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의 청년활동가에게 보내는 편지(2026년 11월 1일 현재 삭제 또는 비공개 상태)에서 ‘인간 본성’이라는 낱말만 쓰지 않았을 뿐 몰역사적 형이상학으로의 도피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박가분의 2016년 글이 몰역사적이라는 점은 당연히 실제 역사로 반박될 수 있는데, 이 글에서 그는 너무 많은 역사 왜곡을 하고 있지만 딱 한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자. 박가분은 “낯선 이웃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면 다른 이웃국가의 노동자 계급이 오히려 반동적으로 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 이후 수년간 혁명적 분위기가 이웃 국가로 번졌다. 헝가리, 바이에른, 핀란드, 라트비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정부들이 짧게나마 권력을 장악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붉은 2년’이라는 혁명적 기회가 찾아왔다. 프랑스, 영국의 노동자들도 거대한 저항에 나섰다. (소비에트 정부가 짧게나마 세워진 바이에른을 포함해)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타도됐다.
이렇게 이웃 국가의 노동계급이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고무돼 자신들도 나서기 시작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 배경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있었고,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를 낳은 제국주의 갈등은 자본의 경쟁적 축적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결과다. 박가분은 2012년의 자신이 던진 “위기를 자본축적과 분리해서 다룰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2016년에는 전혀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박가분은 2016년 글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정작 잘 쓰지 않는 ‘세계동시혁명’이라는 낱말을 의도적으로 선택해 반복해 사용하고 있다. ‘세계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난다니, 그게 가능해? 공상이네.’라는 인상을 주고자 함인 것 같은데, 상당히 졸렬한 글쓰기 방식이다. 물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세계혁명’을 주장하며, 이는 ‘동시적’이어야 하겠지만, 여기서 동시(같은 시간대)라는 것은 박가분이 은근히 주고자 하는 인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혁명은 흔히 상상되는 것과 달리 결코 하루아침의 문제가 아니다. 독일 혁명만 해도 1918년 혁명이 벌어져 1923년 최종적으로 패배할 때까지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2016년 글에서 기대를 걸고 있는 버니 샌더스가 집권한다고 가정했을 때조차 그의 임기는 4년일 것이라는 점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버니 샌더스든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든 그 누가 집권한다고 해서 개혁이 마술같이 이뤄질 수 없으며 조그마한 개혁조차 지배계급의 수많은 반동에 부닥칠 것이라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답을 박가분이 한 번도 내놓은 적이 없다는 문제는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뷔페에서 따뜻한 소시지나 차가운 소시지를 고르듯 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 혁명 대신에 그리고 그것과 대비시켜 입법 개혁이라는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목표를 향한 더 평온하고 느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위기는 20세기 초반의 위기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미래의 혁명에서 ‘동시’는 독일 혁명의 5년보다도 훨씬 긴 시간일 수 있다. 그리고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변질되기 시작한 데에는 독일 혁명의 1923년 최종적 패배가 결정타로 작용했지만, 시간상으로 가장 마지막 사건은 1925~1927년 중국에서 벌어진 노동자 혁명(의 패배)이라고 할 수 있다. 1917년부터 1927년까지 무려 10년이 걸린 것이고, 심지어 러시아 혁명이 변질된 이후에조차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세계적 위기 상황은 계속 반복됐다. 1929년 대공황으로 다시 위기가 찾아왔고, 1930년대의 급진화가 있었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집권을 생각해 보라.
그런 위기의 반복이야말로 마르크스가 평생을 바쳐 분석한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오히려 오늘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답해야 할 핵심적 물음은 ‘그 모든 혁명적 위기가 왜 혁명의 실제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그 물음에 결코 ‘의지주의’로 답하려 하지 않았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개혁주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고 공동전선을 제안해 효과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개혁주의의 기반을 분석하며 노동조합 관료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 자본주의에서의 소외 문제와 연결시켰다. 헤게모니 이론을 통해 인내심을 갖고 진지전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분석하고 주장했다. 빗나간 연속혁명 이론을 통해 제3세계의 혁명이 왜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는가에 답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2012년의 박가분으로 돌아오자.
“오히려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시점은 ‘공감, 연민, 양심의 고통’만으로 아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현실의 장벽에 이미 부딪혀 본 어른이 되었을 때이다.”라는 말에 2021년의 나는 깊이 공감한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 양심의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사람”(우치다 다쓰루)이 되도록 도와주는 사상가는 차고 넘친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치를 그런 데서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공감과 연민을 넘어서 세상을 실제로 바꿀 전략이 필요하고, 마르크스주의는 세상을 바꿀 전략을 제시하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이론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읽지 않은 20대가 바보라 할 수 없지만, 40대를 넘어서도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다면 바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자본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젊은 시절에 타인에 대해 가졌던 아름다운 연민의식이 소시민적인 자기연민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2012년 박가분의 말을 그에게 돌려줘야 해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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