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과 마르크스주의

집요한 또 다른 이의제기는 보수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게 아니라 좌파든 우파든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느 쪽 극단주의든지 폐쇄성, 방어성, 애매모호함에 과민반응 등의 특성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좌익은 우익 권위주의자만큼이나 경직되고 교조적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증거들은 그런 결론을 지지해주지 않는다(최소한 공산국가가 아닌 곳에서는 그렇다). 오히려 증거에 의하면 중심에서 벗어나 정치적 극단으로 갈 때 이데올로기적 극단주의는 실제 증가하지만 경직성과 비유연성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 쪽에서 더 증가한다. 변화에 대한 저항의 두 가지 측면, 즉 정치적 저항과 자신의 신념을 바꾸는 것에 대한 저항이 같이 가는 거라면 그게 합리적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존 조스트 연구팀은 특별히 보수주의 연구 중에서 ‘우파가 경직적이다’ 가정과 ‘이데올로기적 극단이 문제다’ 가정(양쪽 정치적 극단이 경직성에서 대칭을 이룬다는 입장)을 직접 대조할 수 있는 연구들을 따로 들여다보았다.

(중략)

결과를 보면 우파보다 좌파의 경직성이 더 크다고 나타난 연구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13개 연구 중에서 6개 연구에서 좌파의 경직성은 중도파보다 크게 나타났다. 그 6개 연구에서도 우익의 경직성은 좌파나 중도파 둘 다보다 크게 나타났다. 이런 결과는 심리적 특성 중에서 통합적 복합성을 측정도구로 사용했을 때 나타났다. (중략) 양쪽 극단 모두에서 경직성이 더 커지지만 좌파보다는 우파의 경직성이 상당히 더 크다(물론 중도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점, 공산국가에서는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조스트의 새로운 연구팀은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다시 따져보았다. (중략) 그 결과는 진보주의도 좌익 극단주의도 종결에 대한 욕구, 불확실성에 대한 과민함 등의 심리적 특성과는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보수주의가 이들 특성과 연결되었다.

극단적 좌파에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참을성과 개방성이 더 컸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매우 이념적인 좌익 입장을 합리화하려면 상당한 참신성과 복합성이 필요할테니 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이라는 두꺼운 책을 독파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행동을 우익 권위주의자나 보수 이데올로기의 극단에서 기대하기는 힘들다(세련미와 권위주의가 만나서 유연성 없으면서도 기상천외한 논증이 탄생하는 걸 볼 때도 있다).

크리스 무니, 『⁠똑똑한 바보들』, 142-144쪽

2012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인 『⁠똑똑한 바보들』은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저자는 보수의 거짓말, 오해, 잘못된 정치 신념들을 보여주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한 정교한 논거들을 비판한다. 거짓 주장들이 어떻게 사람들 마음속에 존재하고 지속되는가? 보수주의자는 어떻게 그런 내용을 실제로 옳다고 받아들이는가? 이 책은 심리학, 신경과학, 뇌과학, 여론조사 결과들을 이용해 이런 질문들에 답을 내린다.

참고로 말하지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니다. 정재승의 추천사처럼 이 책은 “보수와 진보는 뇌부터 다르다”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수십 년, 아니, 불과 수년 사이에도 사회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비율은 계속 변화한다는 명백한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전제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러지 않는 척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두고 “똑똑한 바보들”이라고 깔보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위에 인용한 구절은 참 좋아하는데, 모름지기 (저자가 “극단적 좌파”라고 칭하는) 급진 좌파라면 “상당한 참신성과 복합성”이 있어야 하고 “불확실성에 대한 참을성과 개방성”이 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저자는 “공산국가”에서는 결과가 다를 수 있다고 지적하는데, “공산국가”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여기는 사람으로서 나에게는 무척 흥미로운 지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머릿속에서 사회주의의 이상향을 한 번도 그린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언제나 실제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배우고자 했고, 파리 코뮌의 경험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부른 것을 구체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르크스가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글로 쓴 내용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비록 그가 말한 내용이 심오하고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정부가 어떻게 조직돼야 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하는지, 어떤 형태의 교통수단이 채택돼야 하는지 등등에 대한 세부 계획이나 지침은 없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꿈꿔 온 이상(理想) 사회의 청사진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하면 반드시 등장할 사회 형태였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정확한 특징들을 미리 예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 그런 특징들은 노동계급이 승리하는 구체적 상황에 달려 있을 텐데, 그런 상황을 사전에 미리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런 문제들은 미래의 노동자들 자신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래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심대하게 바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노동자들 ― 그리고 우리 모두 ― 과 사뭇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르크스가 이해한 사회주의의 근본적 특징이 이른바 ‘소련 진영’과 중국, 북한 등의 가짜 사회주의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가 전망한 사회주의는 노동 대중이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는 사회였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이행)기를 일컬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말한 것은 개인이나 정당이나 소수 특권층이 프롤레타리아 위에 군림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독재가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가 사회를 운영하는 것, 즉 진정한 집단적 노동자 권력이었다.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노동계급은 자신의 국가 기구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을 통해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 새로운 국가 기구의 형태가 어떤 모습일지 마르크스보다 더 잘 아는 이유는 우리가 마르크스보다 더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러시아 혁명의 초기 경험이나 독일 혁명(1918∼23년), 그리고 이탈리아(1919∼20년), 스페인(1936∼37년), 헝가리(1956년), 칠레(1972년) 등등 혁명에 근접했던 상황들의 경험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1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ws.or.kr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나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 등이 살아돌아온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에 마법 같은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갖고 탐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진지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진지한 신념이라고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열린 마음’을 운운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건 열린 마음이 아니라 그냥 바람 가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에 불과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우리에게 화려한 청사진은 없으며 없어야 할 테지만 우리에게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존 몰리뉴가 지적하듯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사상이 없는 경제·역사 이론은 모두 세계 변혁 수단이 아니라 기껏해야 세계에 대한 수동적 논평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에는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주의처럼 다른 계급(국가 자본가 관료 집단이 대표적이다)의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열린 마음’이란 한계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것에 개방적이어야 하며, 경직된 태도를 피하고, 불확실성을 섣부르게 종결시키려는 마음을 거두고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마이클 앨버트 사이의 논쟁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지적한 것을 늘 유념해두고자 한다.

마치는 글에서는 서로 상대방에게 답변하지 않기로 한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의 마지막 답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내가 영국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나에게 신문을 판매하려던 사회주의노동자당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어떻게 당신과 똑같은 조직에 있을 수 있는지 계속 궁금했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므로 한번 심사숙고해 보기 바란다. 레닌주의 정당과 트로츠키주의 정당의 기층 당원들에게서 이렇게 로봇 같은 형식과 내용이 나타나는 것은 유전이나 고질적인 개인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기층 당원들의 실천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당 기구 상층의 다른 당원들은 로봇 같은 문제는 없지만, 권력과 가깝기 때문에 권위주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상당히 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주장의 이면에 있는 것은 “로봇 같은” 획일적인 대중과, 더 민감하지만 지배욕에 따라 움직이는 지식인들 사이의 대조다. 이것은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 이후 자본주의에 대한 집산주의적 대안을 쓰레기 취급할 때 사용됐던 대조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개념에서 독특한 것 중 하나는, 연대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는 개성을 억압할 필요가 없다 — 사실, 그래서는 안 된다 — 는 주장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은 자신이 염원하는 미래 사회를 단순히 반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미래 사회는 현재 사회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신이 “기층”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로봇이 아니다. 그들은 영국 전역의 작업장, 지역사회, 각급 대학교에서 자본주의에 맞서 효과적인 저항 운동을 건설하고자 함께 조직하는 활동가들이다.

내 기억으로는, 올해 초에 당신이 연설한 곳 가운데 하나가 브리스틀이었다. 며칠 전에 나는 브리스틀에서 고참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 한 명을 만났다. 그는 글로스터 근처에서 활동하는데, 몇 주 전 글로스터에서는 아시아인 지역사회를 겨냥한 경찰의 대규모 “반反테러” 작전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자기 집을 떠나야 했고 무슬림 청년 한 명이 구속됐다.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활동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유명 인사였던 그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은 시급히 대규모 항의 집회를 조직했다. 그 집회에는 아시아인 600명 — 그 지역 주민의 10분의 1 — 이 참가했고, 이 때문에 그 지역 출신 노동당 국회의원도 집회에 참가해야 했고 그 집회는 중앙 언론에 보도될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사회주의노동자당 당원은 예외가 아니다.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영국 전역에는 수천 명 넘게 있다. 올해 런던의 대규모 반전 시위들 — 플래카드와 배너를 들고 줄지어 행진하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통해 불멸의 명성을 얻은 — 은 우연히 벌어진 것이 아니다. 영국 전역의 활동가들이 그 시위들을 조직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그런 활동가들 중 소수였을 뿐이지만, 영국 반전운동에 참가한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중요한 구실을 해 왔음을 인정할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중앙집권적 영향력은 당신이 열거한 바로 그 특징들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조직, 사회주의적 비전 — 에 포함될 수 있다. 〈⁠소셜리스트 워커Socialist Worker〉를 판매하는 것은 동일한 과정의 일부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활동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치적 대화를 규칙적으로 할 수 있다. 물론 신문 판매가 서투를 수도 있고 심지어 로봇 같을 수도 있지만(나는 신문 판매에 서툴기로 유명하다), 당신이 사회주의 신문 판매자들을 경멸한 것은 그들보다는 당신의 이미지를 더 나쁘게 만들 뿐이다.

물론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에도 문제점 — 종파주의적 적대감, 사소한 권위주의, 이견 억압 — 은 있고, 나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항상 그런 문제들을 피해 왔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런 문제가 레닌주의자들에게만 독특한 것인가? 내가 아나키스트 운동을 관찰한 — 물론 멀리서 — 바에 따르면, 아나키스트 운동에서도 이런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고 의심할 만한 사례가 충분히 많았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혁명, 특히 스튜어트 왕가 복귀 이후의 사건들을 다룬 크리스토퍼 힐의 저작을 읽어 보면, 매우 비슷한 행동 방식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세계 변혁의 염원을 갖고 있으나 주변화되고 위축돼 정치적 타당성을 잃어버린 혁명적 운동들의 특징이다.

『⁠자본주의의 대안과 사회주의 가치 논쟁』, 137-140쪽

캘리니코스는 앨버트의 경멸 섞인 비난에 맞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분명하게 방어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에도 문제점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숨기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문제점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캘리니코스가 지적하듯 운동과 조직이 “주변화되고 위축돼 정치적 타당성을 잃어”버리면 그런 문제점에 쉽게 노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활동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치적 대화를 규칙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고, 절대로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돼서는 안 된다.

이는 다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칙과 연결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면, (투쟁하는) 노동계급과 정치적 대화를 나누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이 계급을 가르친다는 주장을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당이 무엇이란 말인가? 가르치는 자는 누가 가르칠 것인가? 변증법은 그것이 쌍방향이라는 것이다. 이론은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실천은 그 자체로는 맹목적이다. 물론 현실에서 하는 실천이 이론을 앞선다.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밝혀내기 전에도 사과는 떨어졌다. 뉴턴은 나중에 사과가 어떻게 떨어지는지 설명하는 이론을 찾아냈을 뿐이다. 실천이 언제나 이론에 앞선다. 그러나 이론은 실천이 결실을 맺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실천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이론적인 사람들도 아니다. 이론적이면서 실천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즉각적·장기적인 실천적 결과로 우리의 활동을 판단하라. 실천은 우리의 심판관이다. 우리를 좋아해서 지지하지 마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라. 그대를 시험에 들게 하라.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실천 속에서 여러분들은 셰필드 도서관의 공공노조 파업이나 영국에서 일어나는 다른 투쟁에서 효과적인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이론은 계급투쟁과 관련돼 있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marx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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