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평평한 지구론자

netflix.com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영화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Behind the Curve)〉를 봤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평평한 지구론자들(Flat Earthers)’을 다룬다. 생각보다 괜찮은 영화였다. 여러 종류의 정치적 음모론이 판을 치는 요즘 세상에서, 이들 음모론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에 어느 정도 참고가 됐다.

평평한 지구론을 비웃지 않으려 노력하며 이들을 두고 “그들의 천부적인 탐구심과 규범을 거부하는 태도는 과학적 지식만 뒷받침된다면 과학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 깊었는데, 이 영화는 또한 평평한 지구론자들과 ‘진정한 과학자들’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바로 ‘반증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이다. 영화에서 평평한 지구론자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지만,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올 때마다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다만 여기에서 나는 좀 더 깊이 고민을 하게 됐다.

자연과학계 또한 기존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변칙적 현상들’에 무한히 오픈 마인드를 보여주는게 아니라는 사실은 일단 이 글에서는 제쳐두자. (무슨 말이냐면, 과학자들 또한 기본적으로는 기존 패러다임에 맞춰 현상들을 해석하려 하기 마련이고, 모든 걸 의심하려 들다간 그 어떤 과학도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현상을 다루는 사회과학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한 것 같다.

나는 이 영화의 평을 찾아보다가 생각보다 평평한 지구론자들을 맘껏 비웃는 데서만 이 영화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많아 보여 약간 씁쓸했다. 이 영화가 ‘정상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누구도 확증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 ‘평평한 지구론자’가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하는 반성을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다.

내가 놀란 것은 많은 영화평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에 평평한 지구론을 덮어씌우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태극기 부대의 탄핵 음모론은 가장 자주 나오는 비교 대상이었고, 심지어 TERF의 젠더 부정론에 대해서까지 그러는 사람이 있어서 좀 놀랐다.

하지만 나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지배적 상식’에 반대하는 정치적 사상을 갖고 그에 따라 활동하려는 사람이다보니, 종종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의 정치 사상은 종교적 믿음과, 혹은 심지어 이런저런 음모론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영화에서는 평평한 지구론자들조차 하나의 통일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고, 평평한 지구가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여러 의견 차이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좀 도발적인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자면,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전형 문제(transformation problem)에 관한 이런저런 의견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과 어떠한 점에서 다른 걸까?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그저 또다른 ‘음모론’에 불과한 것일까?

물론 나는 전형 문제에 대한 주류 경제학자들의 비판이 타당하려면 “그것은 마르크스의 전형 절차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도 파산했다는 뜻일 것”이라는 굴리엘모 카르케디의 지적에 동의한다.

모든 사회현상은 과거든 현재든 다른 사회현상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비판은 사실 모든 사회현상에 적용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은 연구의 출발점을 끝없이 탐구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과학’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마르크스주의는 이런저런 음모론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에게는 이 지구의 모습을 설명할 명확한 이론이 있지만, 이 체제의 지배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체계적 이론이 없”으며 그저 “혼란과 낙관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은 우리 삶에서 한 부분만 떼어다 설명하는 메마른 학술 연구가 돼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신비화된 자본주의의 겉모습을 받아들이려는 유혹”, 자본주의의 복잡한 여러 측면들을 “아주 단순화해서 체제의 복잡한 측면을 무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해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제로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그 와중에 많은 수가 그저 지배자들의 가신(家臣)으로 전락했고, “피상적 가격 변동과 체제가 저지르는 범죄를 은폐하는 데만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됐음은 물론이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한 ‘지구 구체론’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셉 추나라가 지적하는 대로, “마르크스는 노동가치론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비난받았”지만 “이런 비난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가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특정 상품의 시장 가격을 알아내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지 않”았고 “자본주의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자 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결국 체제의 동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물론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잘 설명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별 다른 고민과 생각 없이 ‘다수’의 편에 서서, 확증 편향에 빠진 ‘소수’를 비웃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문제는 그 ‘다수’에 속한 자신이 확증 편향에 빠져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여러모로 ‘소수’에 속하는 나 자신에게도 그런 반성이 끊임없이 필요하고, 영화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는 그 반성의 좋은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부디 평평한 지구론자들을 비웃는 데서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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