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리아는 불변하는가
오랜만에 이슬람 사원에 갔다. 오늘은 나이가 꽤 있으신 한국인 신자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슬람에 대해 궁금한게 없냐고 물어오셔서, 좀 고민했다. ‘신앙’의 차원에서 궁금한게 없냐는 얘기일텐데, 나는 그런 데는 관심 없고 ‘이슬람혐오에 맞서 노동계급을 어떻게 단결시킬 것인가’ 같은 주제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
눈치를 보다가 궁금하던 것에 관한 질문을 하나 꺼냈다.
“샤리아는 불변하는 것인가요?”
샤리아(이슬람의 율법)는 “머리 수건을 쓰지 않은 여성을 채찍질하고 강간 피해자를 처벌하며 간음죄에 대하여 참수를 요구”하며, 이슬람교도들은 서방(과 한국)에 침투해 샤리아가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기를 원한다는, (일부) 기독교도들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샤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당연히 변하지 않지. 변하는 것은 인간의 것이지, 하나님의 것이 아니야. 전자공학이 발전하고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해와 달이 뜨지 않는 날이 있던가? 마찬가지야.”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알기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도둑질을 하면 손목을 자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샤리아에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다른 이슬람 나라에서는 그러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샤리아에서는 도둑질을 어떻게 규정하는 건지 궁금한 거예요. 단순히 하지 말라고 하는지, 손목을 자르라고 하는지,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지.”
신자분은 갑자기 사우디 아라비아의 여성 운전 금지 얘기를 꺼냈다. 중앙분리대도 없고 속도 제한도 없는 도로에서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여성이 어떻게 운전하니 어쩌니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살짝 짜증이 나려 하다가, 자기가 오래 살다 온 이집트에서는 여성들이 잘만 운전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무슨 말씀이신지 파악하고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여성 운전 금지는 사우디의 특수성이지, 샤리아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그렇다고 했다. “그런건 공동체가 논의해서 결정하는 것”이지, 꾸란에 여성이 운전하니 마니 하는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러면 도둑질 처벌도 공동체의 논의에 따라서 하는 거겠네요?” “그렇지. 목을 자르든 손목을 자르든 감옥에 가두든… 그런게 샤리아가 아냐. 샤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여전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샤리아에 관해 깊이 아시는 눈치는 아닌 듯했다.
그런데 내 질문이 만족스럽지 않기는 그 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기 모인 이 사람들[무슬림]은 샤리아가 뭔지 관심도 없어. 한국 사람들만 이것저것 관심이 많지. 순니파가 어쩌니, 시아파가 어쩌니 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창문을 열어놓고 창문 밖만 보면 공부가 되겠나? 원래 목적인 공부를 잊어버리고 딴 데에만 관심을 쏟는 거야.”
하지만 저는 ‘신앙’에 관심이 없고 창문 밖을 보며 ‘이슬람혐오에 맞서 노동계급을 어떻게 단결시킬 것인가’를 좀 더 고민해보고 싶은데요….
더 물을 것이 없냐고 해서 없다고 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2024년 2월 25일에 추가:
지금의 나라면 5년 전의 나에게 잘 대답해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좋은 방향의 질문은 아니다”라고 덧붙일 것 같다. 5년 전 글을 읽으니 그 사이에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면이 있긴 하구나 싶어 다행.
아무튼 5년 후의 내가 대답을 하자면….
꾸란에 그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이 있는 건 사실이다. 5장 38절인데, 최영길 번역으로는 다음과 같다.
물건을 훔친 남녀의 손을 자르라 이는 그 두손이 얻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거늘 하나님은 전능과 지혜로 충만하심이라
이 번역만 보면 빼도박도 못해 보인다. 이 번역의 적절성을 따지기에 앞서, 마태복음 18장 8절을 읽어보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역개정)
바로 그 다음 절은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하고 있다.
물론 좀 더 모호하게 해석한 번역도 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새번역)
그런데 그렇게 치면 꾸란도 마찬가지다.
『Quran: A Reformist Translation』의 저자들은 5장 38절의 해석에서 ‘자르다’로 흔히 번역되는 아랍어 동사가 ‘관계를 끊다’, ‘행위를 중단하다’ 같이 좀 더 추상적인 것을 끊어내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화 등 ‘도둑질할 수단을 없애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이 굶주리게 만드는 것을 그 구성원이 음식을 도둑질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큰 범죄로 간주하는 구절이 여럿 있는 것을 지적하며(107:1-7, 89:17-20, 90:6-20) 꾸란 5장 38절을 진짜로 ‘손목을 자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른 구절과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건 어느 해석이 ‘올바른가’가 아니다.
실제로 손목 절단형이 있는 이슬람 국가가 거의 없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손목 절단형이 실제로 행해지는 이슬람 국가가 어마어마하게 억압적이고 어마어마한 불평등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것은 시사적이다.
만약 꾸란 5장 38절을 실제로 손목을 자르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손목이 잘려야 할 자는 빈 살만일 것이다. (최영길의 번역이 사우디 정부의 후원을 받아 이뤄졌고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와하비즘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는 점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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