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내 옆에 서 있는 한 모녀의 대화를 듣게되었다.
엄마, 지하철에 타고 있는데 지진이 나면 어떡해?
지하철에 지진이 왜 나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만약에 말야, 만약에. TV에서 봤는데….
그건 영화잖아, 영화. 영화하고 현실하고 구분 좀 해라, 좀. 그리고 지진은 바다에서 나지 땅에서 안 나.
아니, 영화가 아니라 뉴스에서… 백두산에 지진이 난다고, 폭발한다고….
엄마가 40년을 살면서 백두산 폭발한다고 몇 번을 들었는데 한 번도 폭발 안 했어.
‘자녀와 이렇게 대화하면 안 된다’는 책이 있다면 그 책에 나올만한 내용이 다 들어있는 대화가 아닌가 싶었다.
바쁘고 피곤하거나, 잘 모르기에 자녀의 궁금증에 답을 못해줄 수도 있다. 내가 부모가 된다고 해도 자녀의 물음에 답을 매번 잘해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나은 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적어도, “지진은 바다에서 나지 땅에서 안” 난다는 설명은 틀렸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백두산 폭발에 대해서 답한 것은 “닭의 일생 동안 날마다 먹이를 주었던 농부가 결국에는 닭의 목을 비튼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백두산의 마지막 분화가 1903년이었으니, 당연히 폭발한 걸 못 봤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말하는 방식도 좋지 못하다.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라는 핀잔을 옆에서 듣고 있으니 기가 막혀서 한 마디할 뻔했다. 당연히 지하철에도 지진이 날 수 있다. 오히려 제대로 구분을 못하고 있는 건 누구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만약 정말로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다고 해도 그렇게 핀잔을 줄 일인지.
간단하게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어느 정도 답해줄 수 있는 물음이었다. 서울특별시 홈페이지에서 지하철에서 지진 발생시 대처요령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너무 겁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생각보다 안심할 문제는 아니란 것도 알려줄 수 있다(서울지하철 1∼4호선 전체구간 중 36%가 지진에 무방비라는 연합뉴스 기사가 있다).
만약 영어를 할 줄 안다면 지진을 경험했던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지하철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
조금 더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다면, 지하철에서 지진이 난 상황을 가정하고 대피하는 훈련 동영상을 보여주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할리우드에는 진도 8.3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지하철을 체험해볼 수 있는 세트가 있는 모양인데, 이 세트를 체험한 사람들이 찍은 동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정말 진도 8.3의 지진에 맞게 만들어진 것인가는 좀 더 확인해봐야겠지만).
누구나 스마트폰을 갖고 있어서 지하철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걸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모든 부모에게 이런걸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렇게 반응하지는 말아야겠다, 싶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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