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찜한 한 표

어제 엄마하고 전화 통화하다가 “이번 선거 때 누구 찍을까? 이번에도 네가 찍으라는 대로 찍는다.”라고 하셨다. 내가 투표권이 생기기 전부터 엄마는 (그리고 아빠도 자주) 내가 찍으라는 정당에 찍곤 하셨다.

“이번 총선만큼 고민이 많이 되는 때가 없는 것 같다.”라고 운을 떼었다. 나는 ‘해운대구갑’ 선거구가 투표지역인데, 여기에는 지역구 후보가 네 명이 나왔다. 하태경(새누리당), 유영민(더불어민주당), 이병구(정의당), 문만길(통일한국당).

제19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하태경은 해운대에 살지 않는 사람들도 익히 명성(?)을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떨어져야 하는데 아마 당선될 것 같다는 게 안타깝다. 통일한국당은 언급할 가치가 없으니 넘어가자.

더불어민주당은 유영민을 ‘전략공천’했는데, 이 사람은 전경련 자유와창의교육원 교수를 맡고 있는 사람이다. 안 그래도 더불어민주당 같은 정당에 표를 줄 생각은 없는데, 전략공천이랍시고 내놓은 사람이 0.01% 재벌들의 모임인 전경련 산하에 있는, “시장경제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원의 교수란다. 나 참.

사실 진보정당 후보가 정의당 하나밖에 안 나와서 지역구 투표는 쉬울 것 같아 보일 수 있는데, 나는 좀 고민이 되었다. 이병구 씨는 소위 ‘참여당계’ 사람이다.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합당하려 할 때 강하게 반대했던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가슴이 많이 답답하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사람이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장 보좌관을 했다는 것을 주요 경력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은 소련의 KGB 같은 억압기구일 뿐이고, 당연히 해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곳에서 보좌관으로 일했다는 것을 당당히 내세우는 사람에게 표를 주기가 무척 망설여졌다.

다른 진보정당 후보가 나왔더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한테 표를 주면 되니까. 하지만 나오지 않았고, 나머지 세 후보는 앞서 말했듯 엉망진창이다. 이 상황에서 이병구 씨를 찍지 않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효표를 만드는 것밖에 없는데, 그게 선거 결과에서의 숫자상으로 의미하는 바가 있을까? 어느 바보가 투표하는 방법도 몰라서 무효표를 만든 건지, 나처럼 도저히 찍을 사람이 없어서 무효표를 만든 건지 구분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전국적 통계로 볼 때 이병구 씨는 그 개인보다는 ‘정의당’이라는 당적으로 표현될 거고, 정의당 득표가 하나라도 늘어나는 편이 낫지 않겠나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찜찜한 마음으로 이병구 씨에게 투표를 할 거고, 엄마한테도 이런 고민 과정을 이야기하며 이병구 씨를 찍으라고 말씀드렸다.

비례대표 또한 복잡하다. 진보정당만 네 개, 그중 노동계급에 주되게 기반을 둔 정당만 세 개다. 박근혜 정부 하에서 노동계급이 일정 부분 투쟁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이런 회복은 노동계급기반 정당 중 ‘좌파적 개혁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듯 ‘주류 사민주의’에 가까운 정당인 정의당의 성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투쟁에 적극적인 선진적 노동자들이 정의당을 마냥 좋아만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의당보다 훨씬 ‘좌파적 개혁주의’에 가까운 데다가 대부분 의원들이 노동운동 출신이었던 정당이 선거에서 상당히 성공을 거두는 걸 본 과거 경험도 있는 데 반해, 지금 정의당은 최근 비례대표 순번 논란에서 알 수 있듯 노동운동과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노동당 혹은 민중연합당에 투표할 것인가? ‘3%의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인지 많은 고민이 될 것이다. 득표율 3%를 넘지 못하면 사실상 사표가 되는 상황에서 말이다.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선진적 노동자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그런 이유에서 정의당에 투표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돌파하는 해답은 선거 바깥에 있다. 바로 투쟁이 더 전진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누구에게 표를 줄 것인가의 문제도 사실 투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 생각에서 나도 정의당에 투표하게 되지 않을까 싶지만, 사전투표 마지막 날인 9일까지 계속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엄마한테도 이런 얘기를 풀어서 설명해 드렸고, “(노동계급기반 정당인) 정의당, 민중연합당, 노동당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시는 데를 찍으시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느 정당에 투표하라고 딱 집어서 얘기는 못 드리겠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아마도 노동당에 투표할 것 같다고 하셨다. 이유는 그냥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라시는데, 이런 농담을 하실 때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같은 대학 학과를 나온 후배가 이 지역에서 노동당 활동가로 일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 추측이다.)

어쨌든 나는 비례대표 투표를 계속 고민 중이다. 사실 투표를 하는 그 자체보다, 이렇게 투표 전에 내 의견을 밝히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글로도 정리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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