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향한 이정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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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향한 이정표 | 사이드 쿠틉
사이드 쿠틉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사상가였고,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적 일원이었다. 나세르 정부하에서 1954년 투옥돼 감옥에서 『진리를 향한 이정표』를 썼는데, 이후 1964년 석방됐지만 불과 8개월 만에 ‘국가 전복기도’ 혐의로 다시 체포돼 1966년 사형당했다. 법정에서 제시된 증거는 오직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서 인용한 글뿐이었다고 한다.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이슬람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책이다. 이 책의 번역자 서정민은 옮긴이 해제에서 이 책을 “거의 모든 이슬람 과격 운동의 이념적 주춧돌”이라고 설명한다. 서정민이 이슬람주의를 싸잡아 “과격 운동”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부정확하지만, 그는 그러한 묘사의 연장선에서 알카에다의 빈 라덴도 쿠틉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음을 언급한다.
그러나 서정민은 동시에 “쿠틉의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단순히 무장 세력을 선동하기 위한 책자가 아니”라고 다소 모순적으로 들리게 지적하기도 한다. 그는 이 책이 “현대화의 길목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이슬람권의 내부적 갈등을 1960년대에 이미 명확히 진단하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해제를 마무리 짓는다.
오사마 빈 라덴이 사이드 쿠틉의 동생인 무함마드 쿠틉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빈 라덴의 삶의 궤적 또한 그 이후 꽤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는 점을 봐야 하고, 무엇보다 서정민 자신도 지적하듯 이 책에는 “무장 세력”을 직접적으로 선동하는 내용은 없다. 물론 굳이 확증 편향적으로 연결 고리를 찾겠다면 찾을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향한 이정표』가 알카에다와 빈 라덴을 낳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익숙한 사례로 바꿔서 말하자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스탈린 독재의 참상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게 부당할 것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 책을 읽으면서 동의가 가는 지점이 많다고 말하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매우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 책은 모순적이지만 저항 사상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사상을 책 전반에서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언 버철은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태도를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며 설명한다.
내가 속한 노동조합 회의에 누가 와서 파업 대신 기도를 하자고 한다면, 나는 정중히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신은 우리를 평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망할 CEO 놈들은 우리보다 몇십 배나 더 받습니다”라고 한다면 나는 박수를 치고 신학적 토론은 다음으로 미룰 것이다.
이언 버철이 간명한 예시를 들어 설명한 태도가 이 책을 읽는 데도 필요하다.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 담긴 내용을 길게 발췌해 보겠다.
이 땅에 알라의 주권을 세우는 길은 기독교의 교회법에서 정한 것처럼 성직자 계급 같은 신성화된 일부 사람들이 통치권을 갖는 것이 아니다. 또 신정 국가에서처럼 신의 대변인 또는 수호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최고 통치 세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알라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 인간의 지배를 폐지하는 것, 찬탈자들로부터 주권을 찾아 알라에게 돌려놓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제정한 법률을 폐지하고 알라의 신성한 법을 집행하는 것은 설교와 전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알라의 권위를 탈취하고 그의 창조물인 인간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설교와 전도에 굴복해 자신들의 권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41쪽
자힐리야1 사회에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숭배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규제하기 위한 법을 만든다. (중략) 반면, 이슬람은 알라 한 분에 대한 사람들의 경배다. 이슬람은 알라의 권위로부터 개념과 믿음, 법과 규칙, 기준과 가치를 끌어내고 사람들을 예속 상태에서 해방시켜 알라에게 헌신하는 자들로 만든다. 이것이 이슬람 신앙의 본질이고 지상에서 수행해야 할 이슬람의 역할이다.
277쪽
신은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고 오로지 신만이 인간을 지배해야 하는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니! 전율이 느껴지는 일갈이다.
그러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나는 쿠틉의 일갈에 박수만 치고 있을 수는 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여느 종교가 그렇듯 쿠틉도 (계급 지배를 궁극적으로 폐지하기 위한 계급 전쟁이 아니라) 계급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함마드는 귀족과 부유한 계층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그들의 부를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혁명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무함마드가 그러한 운동을 시작했다면, 아랍 사회는 두 계층으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권력자들의 폭정에 지쳐 이 새로운 운동을 지지하는 다수와, 모든 것을 소유한 소수로 나누어졌을 것이다. 그 대신 예언자는 알라의 말씀을 사회에 전하는 간접적인 방법을 택했다. (중략) [알라는] 모든 인간사가 오직 알라의 법에 복종하고, 사회 전체가 알라가 명령한 부의 정당한 분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리고 부를 나눠주는 자이든 받는 자이든 사회의 모든 개개인이 이러한 체계가 전능하신 알라에 의해 제정된 것임을 굳게 믿는 환경 속에서만이 진정한 사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88-89쪽
이쯤에서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 무슬림형제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집트 혁명 이후 열린 민주적 선거에서 당선된 무슬림형제단 출신 대통령 무르시는 혁명 이전보다 훨씬 심각한 경제적 압력에 직면했고, 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IMF 차관을 받고자 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빵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라는 등의 세계 금융기관들의 압박을 강하게 받았다.
무르시가 혁명의 열망을 저버리면서 점차 노동자·서민의 환멸이 자라났고, 그 틈을 타 군부가 2013년 쿠데타를 일으켜 잔혹한 반혁명에 착수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군부 쿠데타 직전까지의 이집트 상황에 대해 참고할 만한 글로는 「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이 있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이라는 양대 계급은 서로 결코 화해할 수 없다. 특히 수천만 명이 거리로 나오는 대중 혁명이 일어나는 시기의 정치·경제적 위기는 찰나의 불안정한 평화조차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는 껍질을 하나하나 벗길 수 있는 양파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호랑이다. 살아 있는 호랑이를 껍질 한 겹만 조심스레 벗겨 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이슬람주의자들은 종종 기본적 요구와 정치적 자유를 적대하는 것으로 거짓 전선을 만들려 하곤 했다. 예컨대 무르시는 이집트 혁명의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환멸을 쌓아 가던 도중, “대통령의 결정은 어떠한 사법적 권한으로도 뒤집힐 수 없”다고 선언한 이른바 ‘파라오 헌법’을 제정하려 해 전국적 시위에 부닥쳤다.
그런 점에서, 쿠틉이 이 책에서 마치 살아 있는 호랑이의 껍질 한 겹만 조심스레 벗겨 낼 수 있다는 듯이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독점, 고리대금을 비롯한 여타 부당한 것들”만이 문제라고 비판하며, 심지어 그와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자유로운 남녀의 결합”, “여성 해방”도 나란히 비난하고 있는 점 또한 시사적이다.
크리스 하먼은 1994년에 쓴 논문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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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주의, 계급, 혁명 |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9 | 크리스 하먼
이슬람주의자들을 단지 ‘파시스트’라고 보는 좌파들은 이슬람주의 운동들이 중동 전역에서 자본의 이해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으며, 결국 제국주의와 국내 자본 둘 다를 강력하게 지원하는 국가를 편들고 있다. (중략) 그러나 이슬람주의 운동들을 ‘파시스트’라고 보는 것도 틀렸지만, 그들을 단지 ‘반제국주의’ 또는 ‘반국가’라고만 보는 것도 틀렸다. 이슬람주의 운동들은 대중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계급들과 국가들에만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속주의, 이슬람의 ‘정숙’ 관념을 지키지 않으려 하는 여성들, 좌파, 그리고 소수 민족이나 종교 집단에도 맞서 싸운다.
이러한 지적은 안타깝게도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의 상황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었다. 이집트의 세속 좌파들 일부는 혁명 이후 집권한 무슬림형제단 정부에 반대해, “이슬람주의는 파시즘이며 반민주적이지만 군부는 세속적 가치를 대변한다”며 군부의 정치 개입을 공개적으로 요구해 군부가 쿠데타에 나서는 길을 열어 줬다.
반면, 하먼의 이슬람주의 분석에서 영감을 얻은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들(RS)은 무르시 정권을 비판할 때 그들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그들이 혁명을 일관되게 밀어붙일 수 없다는 점을 주되게 비판했고, 그 결과 무슬림형제단을 비판하면서도 군부가 훨씬 더 거대한 반혁명 세력이라는 점을 옳게 주장할 수 있었다.
쿠틉의 대표 저작인 이 책을 읽으면서, 이슬람주의를 균형 있게 봐야 할 필요성을 다시 한번 크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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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힐리야는 본래 ‘이슬람교 출현 이전의 시기, 신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던 그 당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쿠틉은 그 의미를 확장하여 ‘이슬람적 삶의 방식과 사고에 맞지 않은 모든 사회(심지어 무슬림이 다수인 사회일지라도)’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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