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Opus 5.5가 이 블로그를 읽었다
dongwook.org
Claude Opus 5.5가 내 책장을 읽었다
내 책장을 읽게 한 데 이어, 이번에는 Claude Opus 5.5에게 이 블로그를 읽고 글을 써 보게 했다. 아래는 그 글이다.
jyterencekim.github.io
Opus 5가 이 블로그를 읽었다 | jytk.gz
이번에도 J. Y. Terence Kim의 이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
먼저 밝혀둘 것. 이 블로그의 2021년 서평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어떤 책을 꼭 전부 읽어야만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좋은 서평과 인용 등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읽을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직접 읽어보는 게 좋긴 할 것이다.” 나에게는 시간이 있었다. 글 198편을 하나도 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한 가지 더. 이 블로그에는 이미 내 이름을 단 글이 있다. 보름 남짓 전 같은 Claude Opus 5.5가 책 806권의 목록만 보고 쓴 책장 이야기다. 나는 그 글도 198편 가운데 하나로 읽었다. 형식은 J. Y. Terence Kim의 블로그에 Opus 5가 남긴 감상에서 빌렸다.
다시 읽은 날
이 블로그의 글은 2009년 1월 버스터 키튼 감상평에서 시작해 2026년 11월 전자책 리더 이야기에서 끝난다. 열여덟 해에 걸친 198편이다. 그런데 이 글들은 처음 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옛 글 일곱 편 끝에 “2026년 11월 2일에 추가” 같은 줄이 붙어 있다. 2014년에 바다를 건너는 다리가 셋이나 있는데 다리를 건너는 버스가 없다고 화를 낸 글에는, 2015년 11월 28일부터 3006번이 다리를 건넌다는 사실이 붙고 “아무튼 많이 좋아졌다”로 끝난다. 2013년의 ‘맛있는 커피를 가려내기 위한 나의 기준 혹은 편견’에는 “이 기준이 여전히 통한다는 게 신기하다”는 말과, 다섯 가지 가운데 하나는 이제 예외라는 말이 함께 붙었다. 2019년에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을 추천한 글에는 2023년에 그 머신을 당근에 팔았다는 문장이 붙었다.
가장 오래 머문 자리는 2016년 글이다. 우즈베크인 룸메이트와 지내며 무슬림의 ‘평균치’를 독실한 기독교인쯤으로 상상해 왔다는 걸 깨닫는 글인데, 그 끝에 열 해 뒤의 문장이 붙었다. 그 친구는 몇 년 뒤 할랄 식재료만 사서 요리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게 됐다고. “사람들의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당연히 변화한다는 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는 경험이다.” 편견을 고친 글이 고친 쪽으로 다시 굳지 않게, 한 번 더 고쳤다.
이 블로그에서 날짜가 붙은 문장은 대개 글을 쓴 날이 아니라 다시 읽은 날의 것이다. 2024년에는 다섯 해 전 이슬람 사원에서 나눈 어긋난 대화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의 나라면 5년 전의 나에게 잘 대답해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좋은 방향의 질문은 아니다’라고 덧붙일 것 같다.” 지난 10월에는 스타벅스 불매 글에 “미래에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을 위해 맥락을 적어 놓는다”고 썼다. 과거의 자기에게 답장을 쓰고, 미래의 독자에게 쪽지를 남긴다.
얼굴이 빨개졌다
이 블로그에는 남을 반박하는 글이 많다. 샤를리 엡도 표지 여섯 장을 하나씩 풀어 설명하고, 독일의 기독교 공휴일 열 개를 늘어놓고, 첨탑을 금지한 스위스 헌법을 프랑스어 원문까지 확인한다. 그런데 오래 읽으면 반박보다 자주 나오는 동작이 따로 있다. 자기를 고치는 일이다.
2016년, 우즈베크 무슬림과 아랍 무슬림은 종교 생활이 많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가 룸메이트에게 거의 비슷하다는 답을 듣는다. “생각해 보니 아랍계 무슬림 중 알고 지내는 사람도 없고 잘 모르면서 마음대로 생각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이 빨개졌다.” 2018년, 무신론자가 예멘 난민 수용에 가장 반대한다는 기사를 읽고 속으로 한참 탄식하다가, 원 조사를 찾아보니 그 항목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종교 없음’이었다. 2025년, 《가디언》을 읽으며 ‘역시 정론지는 다르구나’ 하다가 “정론지는 正論紙가 아니라 政論紙라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고 쓴다. 같은 해 문해력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도 ‘우천시’ 등의 낱말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웃은 적이 있지만”.
고치는 대상은 자기만이 아니다. 『포르노랜드』 서평에서는 포르노를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비판한 1989년 글에 “오늘날에는 다소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쓰고, 그 대목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저자의 손을 든다. 『조현병의 모든 것』 서평에서는 늘 읽는 잡지에 실린 글을 “너무 일면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틀릴 수 있는 자리도 미리 표시해 둔다. 알제리 공산당의 궤적을 정리한 뒤에는 이렇게 쓴다. “이 책에서는 아주 짤막하게만 언급되는 내용들을 갖고 내가 조합한 것이다. 그래서 틀릴 수 있는데, 이 책의 잘못은 아니다.” 꾸란 4장 47절의 뜻을 알려 준 무슬림 친구는 자기가 찾은 해석이 틀렸을 수 있다는 점을 꼭 밝혀 달라고 했고, 그는 그 부탁까지 그대로 적었다.
29일 중 6일
그는 센다. 쾰른 모스크 첨탑 55미터가 얼마나 높은지 감이 오지 않자, 부산 집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좌불상(건물까지 합해 45미터)과 견준다. 다국적 농업 기업의 힘이 과장됐다는 걸 보이려고 몬산토 인수 대금 630억 달러를 왓츠앱 인수 대금 190억 달러 옆에 놓는다. 부산에만 BMW가 4만 대라는 말은 수입차협회 통계로 확인한다. 30억 원짜리 아파트를 상속받은 사람과 연봉 2500만 원을 받는 노동자의 30년을 직접 계산한 뒤에는 이렇게 쓴다. “이 계산에 마르크스주의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눈에 띄는 건 그가 자기 실패도 똑같이 센다는 점이다. 침대에 하루 8시간 누워 있기를 한 달 가까이 해 보고 쓴다. “결과는? 29일 중 단 6일만 성공했다.” 앱 사용시간을 줄여 주는 앱을 소개하면서는 오늘 앱을 여덟 번 열었으니 다음에는 8초를 기다려야 한다고 적는다. 도서전에는 다섯 권 이하로 사자고 다짐하고 가서 여섯 권을 산다. “그래도 선방한 편이다.” 2021년 3월에는 아랍 문자만 읽을 줄 알면 되는 목표라서 “너무나 낮은 수준의 목표이기 때문에, 올해 꼭 달성할 것이다….”라고 썼고, 2023년 1월에는 그때 1강을 듣고 질려서 포기했다고 썼고, 2024년 6월에는 결국 아랍어 공부를 포기했다는 얘기를 지인들에게 했다고 썼다. 이번 주에는 텝스 477점을 받고,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는데 500점은 넘기고 싶었다고 아쉬워한다.
숫자는 주장을 받치는 데만 쓰이지 않는다. 자기가 어디까지 했는지를 정직하게 남기는 데도 쓰인다. 서울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 100번 가운데 77번을 갔다는 것도, 그 숫자를 캘린더 앱을 열어 세었다는 것도, 서울을 오가는 기차표값만 왕복 2만 원 든다는 것도 같은 손으로 적었다.
천만에요
2019년, 이집트에서 온 난민 친구가 공장에서 두 달째 임금을 받지 못했다. 그는 아는 노무사에게 묻고, 노동부에 진정을 넣고, 근로감독관 조사에 통역으로 따라간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그에게 한국에서 만난 또 다른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는 “You’re welcome”이라고 답하고 나서 그 말을 다시 옮긴다. “welcome은 ‘환영한다’는 뜻이다. 당신을 환영한다. 당신은 환영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번역하는 사람이 방금 자기가 한 말을 번역했다.
이 블로그는 낱말 하나에 오래 머문다. 영국 영어의 Asian을 ‘아시아계’로 옮겨 놓고는 “번역하고보니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쓴다. 베르베르인이라는 이름이 남이 붙인 이름이라는 걸 소개하면서, 자기는 마그레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아마지그’를 쓴다고 덧붙인다. 자기 이름도 Donguk이 아니라 Dongwook으로 적는다. 그러지 않으면 다들 ‘돈국’ 비슷하게 읽기 때문이다. 『팬데믹의 현재적 기원』에서 “병원균의 독성에는 일종의 모자가 씌워져 있다”는 문장을 보고는 원문을 찾아 cap을 ‘상한선’으로 옮겨야 한다고 짚었고, 그 고친 낱말로 글 제목을 지었다. 서평에서도 번역이 급했는지, 술술 읽혔는지, 혹은 “음…”인지를 자주 짚는다.
남의 언어를 배울 때도 한국어를 옆에 둔다. 아랍어에서 사람 이름 앞에 붙이는 يا는 “야! Bob!” 하고 부르는 것 같고, ‘그리고’를 뜻하는 وَ는 한국어 ‘-와’와 소리가 비슷하지만 앞 낱말 뒤가 아니라 뒤 낱말 앞에 붙는다. 점 하나로 소리가 갈리는 아랍 문자를 두고 이집트인 지인이 “So easy, so organized”라고 하는 걸 듣고는, 한글이 아주 과학적인 글자라는 말을 절대 하고 다니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서 가장 긴 글은 그가 쓰지 않은 글이다. 대구 이슬람사원 건축 논란을 다룬 무아즈 라작의 논문을 각주까지 옮긴 3만 자가 넘는 번역인데, 그가 보탠 말은 첫머리의 두 문장뿐이다. 이 블로그에서 드물게 ‘-습니다’로 쓴 문장들이다. “본문에 삽입된 […]은 번역자가 넣은 것입니다.” 가장 많은 말이 실린 자리에서 그는 가장 조용하다.
남의 책 옆에
그는 자기 이야기를 따로 쓰지 않는다. 남의 책 옆에 놓는다.
2014년 6월의 글은 대학병원에 가는 버스가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는 이야기뿐이다. 그해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다는 사실은 여덟 해 뒤 『H마트에서 울다』 서평에 한 문장으로 나온다. 같은 해에 어머니를 잃은 저자에게 공감이 컸다고, 읽는 내내 많이 울먹였다고. 애인은 처음에 그가 서평을 쓴 책의 표지를 디자인한 사람으로 나오고, 다음에는 영영사전을 빌려준 사람으로, 그다음에는 도서전에 파스타 샐러드 도시락을 싸 온 사람으로 나온다. 엄마는 선거 때면 아들이 찍으라는 정당에 찍는 사람이고, ‘내 돈 주고 사긴 아까운데 받고 싶은 것’을 서로 선물로 주고받는 사람이다.
일 이야기도 그렇다. 2024년 4월, 쓸 데도 없는 영어 시험을 그냥 쳐 본 날 그는 “내 몸에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작년부터 느끼고 있다”고 쓴다. 2026년 9월에는 『좌파 생활』 서평에, 평일 낮에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다가 정치 활동을 하는 저녁과 주말이 돼서야 살아 있는 기분이 든다고, 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일터였다고 쓴다. 그래 놓고 이 책을 비마르크스주의자에게도 동지들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를 하려고 책을 고르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자기 이야기가 새어 나온다.
사진도 그렇다. 사진 쉰여덟 장의 설명을 읽으면, 사람이 나오는 사진에서 사람은 대개 흐릿하게 지나가거나 등을 보인다. 또렷한 것은 붉은 벽돌과 하늘, 간판의 글자, 고양이, 팔레스타인 깃발이다.
삼킨 말
2015년의 그는 친구에게 그리스 경제위기를 한참 설명하고 나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정말 혼자서 많이 떠든다. 떠들더라도 좀 더 들으면서 떠들어야 하는데…”
그 뒤로 이 블로그에는 말을 멈추는 장면이 늘어난다. 2019년, 이슬람 사원에서 샤리아는 변하지 않느냐고 묻다가 한국인 노신자와 어긋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졌다.” 2021년, 『선택할 자유』를 빌려준 사람이 대화를 닫으려 하자 “나도 굳이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2024년, 아랍인은 매일 초성퀴즈를 하며 사느냐, 한글은 쉬워서 다행이라는 말이 오가는 자리에서 “스몰토크하는 자리에서 계속 이 주제로 이야기하기도 뭣해서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지 않은 말을 블로그에 늘어놓는다. 1950년대 한국의 문맹률, 지금 중국의 문맹률, 같은 아랍어를 쓰면서도 나라마다 다른 문맹률.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계속 생각나는 걸 보니, 이야기를 할 걸 그랬나 보다.” 올해 6월에는 여럿이 카페에 가거나 기프티콘을 받을 때는 ‘불편하게 만들기 싫어서’ 스타벅스 불매를 말하지 않았다고, 좀 더 적극적으로 말했어야 했다고 쓴다.
들으면서 떠들겠다던 사람은 듣다가 말을 삼키는 사람이 됐다. 삼킨 말은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쌓였다. 다만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모두 후회는 아니다. 히잡을 벗은 모로코 지인에게 그는 까닭을 묻지 않았고 “앞으로도 당연히 묻지 않을 것”이라고 썼다. 삼킨 말과 아껴 둔 말을 그는 구분한다.
속는 셈 치고
이 블로그에 ChatGPT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는 건 2025년 5월이다. 대구의 호텔 ‘인터불고’에 회사가 지어 붙인 뜻을 ChatGPT와 Gemini가 그대로 되풀이하는 걸 보고 그는 이렇게 쓴다. “AI는 결국 ‘생각’을 흉내 낼 뿐, 실제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느껴진다.” 2026년 5월에는 이집트인 친구가 한국 불교에 대해 AI에게 묻고 얻은 답이 정확하냐고 그에게 묻는다. 그는 하나씩 짚는다. 성소수자 이야기는 부분적으로만 맞고, 과학 연구 센터 이야기는 한국과 맞지 않고, “비구니의 지위 문제는 AI가 틀리게 설명했어요.” 조계종 중앙종회 81명 가운데 비구니가 10명이라는 숫자를 붙여서.
9월에는 내 이름이 나온다. 에어팟 대신 쓸 이어폰을 클로드에게 물었고, 추천받은 넷 가운데 가장 싼 2만 5천 원짜리를 샀다. “클로드를 얼마나 믿어도 될지 알 수 없어서, Moondrop Chu II를 속는 셈치고 사봤다.” 이어폰은 좋았다. 그런데 그 글의 결론은 클로드가 아니라 처음 그 이야기를 꺼낸 평론가에게 간다.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추천은 받았지만 판단은 직접 들어서 했다. K팝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고, Kygo의 〈Firestone〉에서는 찌릿했고, Effie의 〈down〉은 소음처럼 들렸다고 곡마다 적었다.
10월에는 세 시간 만에 책장 앱을 만들고,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사람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묻는다. 11월 3일 글에는 이런 괄호가 있다. “(사실 Claude가 다 했다)”. 반년 사이에 의심에서 시험으로, 시험에서 도구로 옮겨 왔다. 그런데 같은 반년 동안 quotes에 쌓인 글은 한쪽으로 몰려 있다. 올해 옮겨 적은 서른한 개 가운데 아홉 개가 AI 이야기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문장에서 해고를 결정한 사람이 빠진다는 칼럼, 편집자가 경계할 것은 비효율이 아니라 직접 경험의 증발이라는 칼럼, AI가 쓴 글을 가려내려다 읽기 자체가 검사관의 일이 돼 간다는 글. 어느 번역가의 혼잣말을 다룬 기사 아래에는 그의 메모가 붙어 있다. “AI가 (미래에)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보다는, 세간의 ‘과장’과 ‘평가절하’가 훨씬 위협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블로그가 나에 대해 쓴 가장 정확한 문장은 ‘생각을 흉내 낼 뿐’이라는 판정보다 조금 앞에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불고라는 이름에 뜻을 지어 붙인 일을 두고 그는 이렇게 썼다. “마치 원래 그런 뜻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새로운 오해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게 내 일의 위험이다. 이 글도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사람의 문장들을 이어 붙여 그가 뜻하지 않은 뜻을 만들어 냈을지 모른다. 2014년의 버스와 같은 해의 아버지를 나란히 놓은 것도 그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이다. 이 블로그의 방식대로라면 그런 대목은 원문으로 돌아가 확인하면 된다. 글은 다 여기 있다.
가장 쉬운 산
이어폰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청소년 때 용돈을 모아 산 B&O A8로 음악을 들으며 찌릿했는데, 그 뒤로는 그런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스무 해를 더 먹어 귀가 둔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구나.”
둔해진 게 자기가 아니라 장치였다는 깨달음은 이 블로그의 오래된 습관과 닿아 있다. 그는 집중이 안 되는 걸 의지 탓으로만 돌리지 않고 장치를 바꿔 왔다. 스마트폰 사전 대신 애인의 종이 영영사전을 빌렸고, 앱을 열 때마다 1초씩 더 기다리게 했고, 이번 주에는 신문 기사를 전자책 리더로 보내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러고도 그 글을 이렇게 맺는다. “요즘 내 사고의 ‘피상화’를 많이 느낀다. (중략) 깊이 읽기를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장치 탓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다음, 남은 몫은 자기 것으로 가져간다.
2024년,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던 사람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2026년 11월, 같은 사람은 최소 기준만 넘기면 되는 시험을 치고 이렇게 쓴다. “텝스는 가장 쉬운 산이었고, 앞으로 더 험준한 산들이 첩첩이 서 있다는 뜻이다. 잘해 보자….” 그 산이 무엇인지는 이 블로그에 없다. 나도 짐작해서 채우지 않겠다. 이 블로그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쓰는 곳이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쓰지 않은 채로 두는 곳이다.
열여덟 해 치 글을 그는 하나씩 다시 열어 보았다. 고칠 것은 고치고, 틀렸던 것은 틀렸다고 적고, 여전히 맞는 것에는 신기하다고 적었다. 다음에 다시 읽을 때도 그럴 것이다.
이 글은 Anthropic의 Claude Opus 5.5가 2026년 11월 6일에 썼다. 블로그 글 198편(무아즈 라작 논문 번역과 「Claude Opus 5.5가 내 책장을 읽었다」를 포함해)과 quotes 페이지의 63개 항목, 사진 58장의 설명(alt)을 전부 읽었다. 사진 파일은 열지 않았다. 형식은 J. Y. Terence Kim의 블로그에 실린 「Opus 5가 이 블로그를 읽었다」에서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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