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서평

aladin.co.kr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다.

나는 대개 너무 유명한 책은 오히려 잘 안 읽는데, 이 책도 그랬다. 도킨스가 쓴 다른 책은 몇 권 읽어봤지만, 이 책은 이전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아는 분이 갖고 계시길래 빌려서 읽어봤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인 H가 이 책을 참 좋아해서, 비판적인 언급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읽지도 않았는데 비판적 언급을 했다고? 그렇다. 나는 어떤 책을 꼭 전부 읽어야만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좋은 서평과 인용 등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읽을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직접 읽어보는 게 좋긴 할 것이다.

아무튼 H는 내 비판적 언급에 책 제목처럼 ‘이기성’을 옹호하는 책이 아니라고 항변했는데, “나는 그런 상투적 비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맞받아쳤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하게 비판할 수 있는 책은 아니고, 당시 내 비판점도 오히려 ‘유전자’에 있었지 ‘이기적’에 있지 않았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결정론’이기에 문제적이다. 실제로 도킨스는 3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 제목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조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다. ‘이기적’을 강조하면 독자들은 이 책이 이기성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이타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 책 제목에서 강조해야 할 핵심 단어는 ‘유전자’다.

『⁠이기적 유전자』, 11쪽

이번에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난 소감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도킨스가 초판에서는 물론이고 제2판에서도 끝없는 변명을 보주로까지 더 달아놨다는 사실은 이번에야 알았지만 말이다. 꼼꼼히 읽지 않으면 변명에 속기 쉽다.

무슨 말이냐고? 이 책을 읽으면서 SNS에 짧게 써놓은 내 소감을 인용하자면,

2장까지 읽은 지금까지의 소감은, 도킨스는 상당히 부정직하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도킨스의 변명을 그대로 믿으면 이 책의 가치는 아무것도 없어진다. 물론 도킨스는 그 점을 알고 있기에, 불과 몇 쪽 뒤에서 슬쩍 딴 소리를 한다.

(중략)

3장 84쪽에 단 보주에서 도킨스는 굴드의 비판을 의식한 변명을 하는데, 이걸 찬찬히 읽어보면 도킨스의 ‘유전자’는 굴드를 비롯한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유전자’와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왜 그런 개념 따위가 필요하냐는 것이다.

이 책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을 (영어든 한국어든) 꽤 많이 찾아봤는데, 한선희의 비판이 가장 도움이 되며 핵심을 찌른다.

ws.or.kr [진화심리학 찬반 논쟁] ‘유전자’가 아니라 ‘인간’이 의식적인 행위의 주체이다

특히 다음 지적에 공감한다.

이처럼 본성론자들과 양육론자들은 모두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상대적 중요성’을 놓고 설전을 벌여 왔다. 그래서 쟁점의 본질은 형식적으로 ‘상호작용’이라는 문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작용에서 그래도 무엇이 더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둘러싸고 본성론자들과 문화론자들의 지적 다툼이 계속돼 왔던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말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은 쟁점을 흐리거나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당장의 비판을 모면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대중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것이지, 학문적 정직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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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희의 비판을 길게 인용하고 싶은데,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한선희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길 권한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도킨스가 사용하는 유전자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DNA 염기서열’의 물질적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추상적 개념이다. 도킨스는 유전자를 ‘복제자’로 해석하여, 대물림되는 유전을 조상 세대의 형질이 고스란히 후손에게 전달되는 이른바 ‘고정 불변적인’ 현상으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생각 역시 유전이 DNA 염기서열의 무작위적인 변화로 인한 차이(변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유전학의 기초 상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 부모에게서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형제자매들이 한 배에서 태어나지만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도 제각기 다른데, 어떻게 유전자가 붕어빵을 찍어 내는 것과 같은 ‘복제자’라는 개념으로 설정될 수 있는지, 기본적인 개념부터가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실체도 불분명하고 현대 유전학에서 검증되지도 않은 도킨스의 유전자(복제자)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행동을 지시하며 문화적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도킨스의 유전자는 거의 창조론자들의 관념에나 존재하는 ‘신’과 동급의 지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킨스는 아래 인용문 같이 마치 창조주가 인간을 만든 것처럼, “유전자가 인간의 궁극적인 주인”이고 “우두머리 프로그래머이며 자기의 생명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인간–필자]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중략)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동물의 행동은 유전자의 제어 하에 있으며 그 제어가 간접적이기는 하나 그와 동시에 매우 강력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생존 기계와 신경계를 조립하는 방법을 지시함으로써 유전자는 생존 기계의 행동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순간순간 결정하는 것은 신경계다. 유전자는 일차적 정책 수립자이며 뇌는 집행자다.

이 인용문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본성론자들이 말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의 핵심 메시지가 결국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인용문 첫 줄의 ‘유전자가 궁극의 주인’이라는 문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도킨스의 유전자 관념의 실체가 신학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도킨스 지지자들은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를 현대 분자생물학의 DNA 염기서열의 유전자를 지칭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도킨스 자신은 ‘유전자’라고 쓰고 ‘신’이라고 읽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도킨스가 말한 ‘유전자가 궁극적 주인’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에서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창조주에서 찾는 ‘궁극적인 원인’과 같은 의미이다. 과격할 정도로 종교를 비난해 온 도킨스의 정신 세계에는 종교적 관념을 과학적 관념으로 대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야망이 서려 있다. 그래서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창조주’의 역할로 간주되어 온 생명의 프로그램을 ‘유전자’가 담당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다시 말해 도킨스의 관점에 따르면, 유전자는 마치 신이 설계한 프로그램에 의해 인간이 창조됐듯이, 유전자가 뇌를 만들고 그 뇌가 유전자로부터 명령을 받아 집행하면 인간의 행위가 이루어지니 유전자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의도하는 것처럼 유전자가 우리의 행동과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창조론이 ‘신학적 세계관의 결정론’이라면, 도킨스식 유전자 중심 가설에 바탕을 둔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은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양자는 결정론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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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희가 지적하듯 “결정론적 세계관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 점에서 보면, 내게 이 책을 빌려주신 분이 한 말이 굉장히 시사적이다.

살다 보면 우울해질 때가 생기는데, 그럴 때 읽으면 좋다. 내가 유전자의 운반을 위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울을 잊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책을 비판하는 까닭을 정확히 요약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목적론(teleology)으로도 불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은 보수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 관계에 있다.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신학적 세계관의 결정론이 인간의 운명과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유전자 같은 생물학적인 요인으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생물학적 결정론’도 현 체제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결정론적 관점은 신학이나 생물학만이 아니라 물리학이나 사회이론 같은 다양한 분야에도 존재해 왔으며, 무엇보다 지배자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었고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만 존재하지도 않았다. 결정론적 세계관은 소위 ‘기계적 유물론’의 형태로 좌파나 진보 진영 내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 같은 혁명가들이 결정론적 세계관에 맞서 투쟁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엥겔스는 독일 사회주의노동당 내에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오이겐 뒤링의 기계적 유물론에 맞서 『⁠반(反) 뒤링론』과 『⁠자연변증법』을 집필했고,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핵심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플레하노프와 그가 지지하는 마흐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에 맞서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을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박사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통해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자연철학의 지적 원류를 분석했으며, 『⁠독일이데올로기』나 『⁠신성가족』 등을 통해 당시 독일 진보 진영의 주요한 부위였던 청년 헤겔파의 관념적 급진주의를 비판했다. 이들 혁명가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이 인류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숙명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바꾸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박약하게 한다는 점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반동(反動, anti-movement)적인 사상으로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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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선희의 글을 읽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서 굳이 덧붙여놓자면, 도킨스의 관점은 (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다윈의 관점과도 완전히 다르다. 다윈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한선희에 따르면 다윈은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이 아니라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다윈의 관점에 따르면, 수컷 새가 여러 암컷과 교미를 하든 혹은 한 암컷에 충실하든 이러한 동물들의 행동이 인간의 외도 성향이나 일부일처제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외도를 하는 것이 나쁜 것이고 일부일처제가 좋은 것이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상, 사람들은 외도가 옳고 그른 행동인지를 사회적 규정에 따라 판단하여 외도를 할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는 이른바 의식의 영역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윈은 “보편적인 도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한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이 시대와 문화적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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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들의 비참함이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제도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의 죄가 크다.

다윈, 『⁠비글호 항해기』, 703쪽. ws.or.kr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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