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랜드』 서평

aladin.co.kr 포르노랜드 | 열다 페미니즘 총서 5 | 게일 다인스

게일 다인스가 쓴 『⁠포르노랜드』를 읽었다. ‘당신이 웃어넘긴 야동의 실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쉴라 제프리스 등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 도서를 전문으로 출판하는 열다북스에서 나온 책이다 보니, 과연 괜찮을까 싶은 걱정(?)이 좀 있었다. 다행히 괜찮은 책이었고, (비록 상당한 한계가 있는 책이지만)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다.

게일 다인스는 스스로를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규정하는 모양인데, 이 책에서는 분리적 페미니즘의 느낌까지는 나지 않는다. 부차적인 이야기이지만, 책 첫머리의 헌사를 “내 평생의 사랑, 데이비드[배우자]와 T[아들]에게”로 쓰고 있기도 하다. 트랜스 여성에 대해서는 책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아 입장을 알 수가 없다.

일반으로 말해, 어떤 페미니스트가 남편, 남성 동료, 남자친구, 아들이 기득권을 가졌다고 봐도 이들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그는 단순한 급진적 페미니스트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성을 적대한다면 그는 분리적 페미니스트이다.(남성을 기득권자로 보는데도 어떻게 분리적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지만, 현실의 압력은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물론 다른 분야의 급진주의자도 덜 일관되게 만든다.)

급진적 페미니즘을 급진적 방향으로 가장 극단까지 밀고 나간 것이 바로 분리적 페미니즘이다. ‘분리주의’라는 말은 남성과의 그 어떤 접촉도 극력 기피한다는 뜻이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분리적 페미니즘을 동일시해선 안 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는 둘이 서로 구별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융합돼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2014년 영국 대학생 페미니스트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자신이 “급진적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답변한 사람은 응답자의 18.5퍼센트였고, “분리적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답변한 사람은 1.2퍼센트밖에 안 되었다. 이 현상은 이제 둘을 동일시할 수 없음을 뜻한다.

최일붕의 구분을 참고할 때, 게일 다인스는 이 책에서 급진적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는 분명히 보이지만 분리적 페미니즘은 보이지 않는다. ‘들어가며’에서 하는 말만 인용해봐도 이렇다.

포르노가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고 여자의 몸을 취급하는 방식이 더욱 가혹해지면서, 남자들이 그걸 보면서 어떻게 발기를 유지할 수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자가 고통받는 장면을 즐기는 이들도 일부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평범한 남자들이 그렇게까지 여자를 혐오하는 사디스트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는 분명 포르노 제작자들이 만들어 내는 남자의 이미지이긴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성 혐오자’라는 평판과는 달리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부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들은 결코 남자들이 날 때부터 여자를 혐오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아들이 있는 페미니스트 중에서 자기가 낳고, 먹이고, 씻기고, 키운 사랑하는 어린 아들이 포궁에서부터 「⁠개그팩터닷컴」으로 향하는 자동 유도 장치를 손에 쥐고 태어난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포르노랜드』 49-50쪽

다만 책의 끝에 실린 국지혜(열다북스 대표)의 해설은 훨씬 분리주의 색채가 강하고, 내가 후술할 이 책의 한계를 오히려 또렷이 강화한다.

이 책은 읽으면서 좀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포르노의 내용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읽기가 힘들었다. 게일 다인스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 때문에 일부러 그런 방식을 택했다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포르노 산업을 연구했지만, 나는 잔인한 하드코어 포르노가 이토록 빠르게 인터넷을 장악할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해가 갈수록 포르노 이미지가 점점 더 하드코어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래도 오늘날 곤조 포르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인성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인터넷이 포르노계의 혁명을 일으켰으나 강연을 하러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많은 이들이, 특히 여성과 기성세대가 지금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종종 현재 주류 포르노로 간주되는 것들을 상세하고 노골적으로 묘사하기로 한 이유다. 그중에는 포르노의 언어를 쓰지 않고는 그 이미지를 묘사하기가 아예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러한 언어는 제한적으로, 그 이미지와 메시지가 담고 있는 잔혹한 현실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경우에 한해 사용했다.

『⁠포르노랜드』 23-24쪽

번역자 신혜빈은 ‘옮긴이의 말’에서 “저자가 잔혹한 현실을 전달하기 위해 갖고 온 포르노의 언어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읽는 것만 해도 괴로운데, 그걸 우리말로 옮기는 건 또 다른 차원의 괴로움을 안겼다. 여자를 폄하하고 성적 대상물로 전락시키며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시선에 내 시선을 포개야 했기 때문이다.”(327쪽)라고 좌절감을 토로한다. 번역자의 토로가 전혀 과장이 아닐 만큼, 읽기가 힘든 부분이 종종 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포르노를 비판한 글에서, 내가 이전에 읽으면서 ‘오늘날에는 다소 업데이트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느끼고 넘어갔던 것을 잠깐 짚어야겠다.

1986년(정치적 분위기가 1970년대와 완전히 달랐다)에 미국 법무부 산하의 한 위원회는 공격적 포르노와 여성에 대한 폭력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첫째, 90퍼센트 이상의 포르노가 일반적 성행위를 다룬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최근 《⁠플레이보이》에서 나타난 폭력 수위는 명백히 1977년보다 낮다(심지어 어린이 만화보다도 낮다). [창업자] 헤프너가 폭력 수위에 주의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1977년에 《⁠플레이보이》와 《⁠펜트하우스》에 실린 사진 가운데 폭력적인 것은 5퍼센트 정도였다. 둘째, 연구자 자신도 폭력적 이미지가 폭력적 행위를 낳는다는 페미니스트와 ‘도덕적 다수파’의 주장에 영향받는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54쪽

물론 포르노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포르노의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폭력적(대부분 그렇지 않다)이라거나 남성 이용자를 위해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한다(이 점은 문제지만 단지 포르노만의 문제가 아니다)는 게 아니라 성행위를 실제 인간관계와 떼어내 맥락 없이 그린다는 점이다. [상호작용하는게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반응하는 건 성행위가 아니라 익명의 이용자를 위해 육체적 행위를 묘사하는 것이다. 포르노는 성행위를 완전히 고립시키고 대상화해 보여 준다. 포르노는 성이 상품처럼 팔리고 여성 차별이 생활 곳곳에 매우 확고하게 스며들어 있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러나 포르노라는 거울은 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현실의 인간은 역동적인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싸우고 자신과 타인을 바꾸고자 노력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포르노는 바로 인간관계의 이런 역동성을 생략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58쪽

“현실의 인간은 역동적인 삶을” 살며,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논쟁하고 싸우고 자신과 타인을 바꾸고자 노력”한다는 실라 맥그리거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굉장히 중요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인간은 1차원적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포르노가 대부분 폭력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이 글이 발표된 1989년에는 맞았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거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 까닭이 인터넷이 일으킨 ‘포르노 혁명’에 있다고 주장하는 게일 다인스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1989년에 발표된 실라 맥그리거의 글이 실린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보다는 2015년에 출판된 주디스 오어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에서 포르노에 대한 분석이 오늘날의 현실과 조응한다는 점에서 더 낫다.)

개인적으로 『⁠포르노랜드』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5장 ‘새어나오는 이미지’였는데,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 좀 더 치밀하게 접근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길게 인용해보겠다.

포르노가 그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것은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벌집을 건드리는 행위다. 일부는 포르노가 현실 세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 특히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가 여성에 대한 억압을 부추기고 정당화한다고 본다. 아마 포르노가 그 이용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항하는 가장 목소리 큰 논리는 “포르노는 판타지다”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판타지는 머릿속에 존재하고 그 안에만 머무르며, 관계, 섹스, 사랑, 친밀감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는 절대 새어 나가지 않는다. 남자는 포르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중략)

실제로 포르노가 만들어 내는 세계는, 대부분의 다른 미디어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인지하는 세계다. 하지만 포르노가 실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건 엄청난 비약이다. 예컨대 광고 속 모델 이미지가 포토샵과 기술력을 동원해 실제 모습을 더 좋게 보이도록 한 것임을 많은 여자들이 알고 있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그 비현실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모방하려 제품을 구매한다. 그러한 여성 이미지가 아무리 판타지스럽다 해도, 그 이미지는 여성 대부분의 삶에 다양한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는 성형수술 산업의 성장이다. 미국 미용 성형외과학회(ASAPS)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총 미용 시술 건수가 465% 증가했고, 매년 1천2백만 건의 시술이 이루어진다. (지방흡입술, 얼굴 리프팅, 이른바 ‘바이오닉 패키지’, 즉 복부지방 제거술, 가슴 성형, 안면 ‘회춘’술이 여기에 해당한다.) 성형수술에 들어가는 돈은 연간 125억 달러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고, 그 수치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포르노랜드』 185-187쪽

나를 비롯한 정말 많은 미디어 연구자들이 (몇 가지만 꼽자면) 「⁠폭스 뉴스」나 러시 림보, 글렌 벡 같은 보수논객이 현실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는 우파 미디어의 판타지스러운 메시지가 현실의 지역, 국가, 세계 정치에까지 새어 나오지 않을 거라면서 그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유색인은 깡패나 공짜 복지 수혜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빈곤층은 일하기 싫어한다며 조롱당하고, 이민자는 백인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아랍인은 테러리스트로 지목당하는 그런 세계를 구축하는 우파 미디어를 보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이 세계를 판타지라고 생각할 거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 상상의 장벽을 세움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의 관념을 형성하는 이 우파 이미지의 힘을 축소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쇄도하는 이미지가 진보주의자들이 참기 힘든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 진보주의자 중 많은 이들이 포르노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으려 할까? 어떤 이들에게는 포르노가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일이 매우 극단적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를 오도하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포르노가 강간으로 이어지는가?” 여기서 묻히는 건 포르노가 문화와, 그 이용자인 남성을 어떤 방식으로 형성하는지를 묻는 더 예리한 질문이다. 내가 아는 반포르노 페미니스트 중 그 누구도 단일한, 혹은 소수의 특정 이미지가 비강간범이 강간하도록 이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의 주장은, 포르노 이미지가 총체적으로 작용할 때, 최소 여자에게 적대적이고 최악의 경우 여자의 신체와 정서 건강에 매우 위험한 세계를 구축한다는 논리다. 편협하고 왜곡된 방식으로 반포르노 페미니스트의 연구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한 상징적인 기사에서, 대니얼 버나디는 앤드리아 드워킨과 캐서린 매키넌이 “포르노는 남자가 여자를 강간하게 만든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드워킨과 매키넌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포르노 비평을 진전시킨 선구자로, 포르노를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될 시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두 사람 모두, 포르노는 남성 섹슈얼리티에 복잡하고 다층적인 영향을 미치며 강간은 단순히 포르노 때문에 발생한다기보다 남성 지배적 사회구조와 얽힌 문화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리는 포르노가 그러한 사회의 중요한 행위자 중 하나이며, 포르노가 여성혐오적 이데올로기를 너무도 완벽하게 담고 있지만, 그것이 단순하게 무조건 강간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은 포르노가 성차별적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로 넘쳐흐르는 사회의 더 넓은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간과한다는 주장이었다.

『⁠포르노랜드』 190-191쪽

5장의 제목처럼, 분명히 포르노의 영향은 ‘새어나온다.’ 포르노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건 비약이다.

그러나 게일 다인스의 견해에 100% 동의해 줄 수는 없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서 핵심적으로 제기해야 할 반론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너무 크게 본다는 것이기보다는(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그 영향의 크고 작음은 본질적인 비판은 아니라고 본다), 그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당최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결국 게일 다인스는 5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허망한 결론만을 내놓고 만다.

즉, 남자가 포르노의 서사에 대항하려면 어떤 것에 노출되어야 할까? 나를 비롯한 미디어 연구자들은 자본주의와 짝을 이루는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속적 유입으로부터 사람들의 면역력을 길러주는 방법을 논의할 때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대개 그 해답은 그것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여 소비 이데올로기의 허위적 본질을 드러내고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있다. 포르노의 반이데올로기 또한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 메시지를 방해하고 파괴해야 하고, 포르노만큼 강력하고 즐거워야 하며, 남자에게 포르노 속 여성의 이미지는 허구이고, 특정한 형태의 섹스만을 팔기 위해 꾸며낸 거라고 설득해야 한다. 또한 이 대안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섹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하며, 그것은 성 평등과 정의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한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 노출된 남성은 극히 드물다. 남자 (그리고 여자) 대다수는 성 불평등이 자연스러우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실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 지배적인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매일 주입당하여 살아간다.

『⁠포르노랜드』 210-211쪽

현실의 성차별이 단지 성차별 ‘이데올로기’의 탓뿐인 것일까? 우리의 역할은 그저 거기에 맞서는 ‘대항 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것일 뿐일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단지 시지프스의 노동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인간이 생산과 재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장례식 추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을 잘 표현한 바 있다.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에 대한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인류는 정치, 과학, 예술, 종교 등을 수행하기 전에 우선 먹고, 마시고, 잘 곳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한다는 가장 간단한 사실이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의 만연으로 숨겨져 왔었습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당면한 물질 수단의 생산과 임의의 사람들이나 임의의 시대에서 필연적으로 획득되는 경제 발전의 정도는 국가 기구, 법률 개념, 예술, 그리고 심지어 종교에 대한 관념 등 관계된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 온 것들의 토대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설명되어야만 하는 견지에서, 지금까지 그랬던 경우와는 반대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엥겔스는 이러한 방법을 따라 『⁠가족, 국가, 사유재산의 기원』에서 계급사회의 공고화가 국가의 형성과 여성의 종속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ws.or.kr [엥겔스 탄생 200주년] 엥겔스가 파헤친 여성 차별의 기원

여성 차별에는 ‘물질적 기원’이 있고, ‘역사’가 있다. 이러한 주장이 주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여성 차별이 생겨난 이런 역사적 과정은 (함무라비법전을 근거로 여성 차별이 언제나 존재했다고 말하는) 브라운밀러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강간이나 폭력 없는 사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드워킨과 브라운밀러 등이 제시하는 비관적 전망, 즉 사회가 변해도 성별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완전히 반박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23쪽

사회가 변하면 성별 관계도 변한다. 여성 차별의 기원을 아는 것은 여성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급사회의 공고화가 여성의 종속으로 이어졌다면, 여성 해방을 위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계급사회의 폐지다.

(이 말을 두고 지금 당장의 여성 차별에 맞서는 것을 계급사회의 폐지를 추구하는 것과 대립시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 된다. 주되게 스탈린주의의 유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많이 갖는 오해이기에 굳이 덧붙여둔다. 볼셰비키 혁명가 이네사 아르망이 말했듯, “사회주의 없는 여성해방을 생각할 수 없듯이, 여성의 완전한 해방 없는 사회주의도 생각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 해방과 계급사회의 폐지를 연결시키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다.)

aladin.co.kr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 실라 맥그리거

반면 ‘강간 문화’와 ‘포르노 이데올로기’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게일 다인스가 다소 맥 빠지는 결론을 내놓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 문화의 포르노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내게 마법 같은 해결책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우리는 거대한 경제 구조와 맞닥뜨리고 있다. 포르노 산업과 싸우려면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적 운동으로써 저항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저항은 개인적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희망적인 시작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포르노를 이용하는 남자와는 데이트하지 않겠다는 여자 청년, 자녀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주는 모부, 체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교사, 섹슈얼리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포르노를 보이콧하는 남자도 있다. 더 넓은 층위의 사회적 움직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러한 개인적 형태의 저항이 현재로서는 가장 의미 있다.

『⁠포르노랜드』 320쪽

그리고 맥 빠지는 결론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결론이 있을 수 있다.

다행히도 『⁠포르노랜드』에서는 그러한 견해는 보이고 있지 않지만, 포르노에 대한 잘못된 분석이 잘못된 실천으로 나아간 역사를 볼 때 우리는 좀 더 주의 깊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량생산된 포르노의 성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영향에 혐오감을 느껴서, 일부는 포르노와 성매매가 그 자체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특별한 “억압 도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시각으로 말미암아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앤드리아 드워킨과 캐서린 매키넌은 1983년 미국에서 우파 단체들과 협력해, 포르노가 시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법정 소송을 벌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들이 제안해서 통과시킨 조례는 결국 위헌판결을 받았고, 포르노 반대 활동가들을 포함한 다수의 페미니스트들은 드워킨과 매키넌의 활동과 그들이 우파와 동맹한 것을 매우 비판했다.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국가가 포르노를 검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국가의 개입을 활용해서 포르노에 맞서 싸우려 한 시도는 매우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더 최근에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인 줄리 빈델은 우파 단체들과 협력해 랩 댄스 클럽 금지 운동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 국가권력에 호소하는 것은 실수다. 이것은 그런 운동에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을 경찰과 법정이라는 형태로 일상적으로 희롱하고 처벌하는 것이 다름 아닌 국가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포르노는 여성 억압의 한 징후이지 그 근원이 아니다. 여성은 가장 초기의 포르노 사진과 인쇄물이 대량생산되기 훨씬 전부터 억압받았다. 포르노를 검열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고 오늘날에는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특정 형태의 포르노, 예를 들어 폭력적 내용을 포함한 포르노를 금지하는 것은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찰, 공무원, 판사 등의 국가기관에 우리의 섹슈얼리티를 단속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면 그들은 그 권한을 이용해 자신들이 ‘불온’하다고 여기는 글과 이미지도 금지할 것이다. 그들은 성소수자의 글이나 심지어 안전한 성생활에 대한 구체적 조언들도 겨냥할 수 있다. 아동 학대를 담은 포르노는 이미 다른 법령으로 금지돼 있다.

포르노를 단속하는 법률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는 “1984년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부 시절 도덕적 반동의 일환으로 ‘게이 이즈 더 워드’ 서점을 침탈해 수백 권의 서적을 압수하는 데 외설물출판금지법(1959)이 활용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전에는 레즈비언의 사랑을 다룬 래드클리프 홀의 소설 《⁠고독의 우물》이 오랫동안 금지됐다. 검열에 반대하는 한 페미니스트 저술가가 지적했듯이 “이 책에서 연인들의 행위를 명시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그날 밤 그들은 사랑으로 하나가 됐다’는 불후의 문장뿐”인데도 말이다. 개혁 입법으로 여겨졌던 법률이 국가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용되기만 한 사례들은 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스토킹처벌법은 환경운동가들을 상대로 사용됐고, 공중질서법은 원래 파시스트 집회를 금지하기 위한 법안이었으나 반反자본주의 시위와 그 밖의 항의 행동을 금지하는 데 빈번히 사용됐다. 국가는 선의의 중립적 권력이 아니므로 공적이든 사적이든 우리의 삶에 개입할 힘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294-296쪽

aladin.co.kr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 주디스 오어

실라 맥그리거가 지적하듯, “포르노[는] 자본주의적 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성의 산물”(『⁠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 48쪽, 강조는 인용자)이다.

『⁠포르노랜드』는 이를 정반대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여러 한계가 있지만(특히 어떤 대안이 필요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럼에도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들 남자 대다수는 ‘야동녀’를 바라보듯 자신의 여자친구를 바라보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점점 더 그 둘을 구분하기 힘들어한다. 로버트는 수년간 포르노를 봐 왔지만 여자친구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이렇게 결심했다. “포르노를 아예 끊으려고 했다. 영화를 다 치워버리고 웹사이트 회원도 모두 탈퇴했다. 그러면 쉬워질 줄 알았지만, 결코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야동 생각을 많이 하고 있고, 이건 마치 여자친구를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남자들 중 자신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서 나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경우도 있는데, 여자는 대개 포르노를 둘의 성생활에 도입하려는 남자의 욕구에 당황한다. 관계가 진전되기까지 여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남자는 포르노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언젠가 강연이 끝난 후 연인 관계인 여자와 남자가 나에게 찾아와 남자의 포르노 이용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여자는 포르노를 둘의 관계에 끌어들이려는 남자에게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남자가 나와 여자에게 답변한 내용은, “많이 볼 필요도 없다. 그냥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정도면 된다”였다. 여자가 이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싼 여자가 된 기분이다. 남자친구가 야동 보는 것도 알고 있고, 그걸 그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지만, 그게 우리 관계에 끼어드는 건 싫다. 남자친구가 야동에서 본 특정 행위를 나에게 해 보라고 하는 게 싫다. 남자친구의 태도만 봐도 그게 뭐 하는 건지 감이 온다.” 살과 살이 맞닿을 때 생겨나는 친밀감, 깨어나는 감각, 유대감은 아예 부재하거나 이들 남자가 성적 쾌락을 얻는 데 의존하게 된 산업의 상품에 압도당한다. 포르노 문화에서는 섹스를 친밀감과는 분리된 행위로 바라보도록 훈련받기 때문에, 이용자는 섹스를 정서가 아닌 수단적 측면에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 남자 이용자가 포르노를 “여자 안에다가 자위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고 표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 5년여간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대학생 나이대의 남자들이 내게 포르노 중독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중독 모델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는데, 남자들의 포르노 이용에 대한 책임 회피의 수단으로 이용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호소를 듣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치료사들도 임상적 중독증상을 보이는 남환자를 점점 더 많이 보고 있다. (중략)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얘기했다. “포르노를 멀리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모니터 앞에 가서 앉는다. 이게 마지막일 거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같은 일이 또 되풀이된다.” 일부 캠퍼스에서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어, 그러한 남학생들에게 지지집단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남자들이 안타깝고 동시에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납치해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지경까지 그들을 몰아넣은 포르노 산업에 분노를 느낀다.

『⁠포르노랜드』 201-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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