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된 정체성』 서평

aladin.co.kr 오인된 정체성 | 아사드 하이더

아사드 하이더가 쓴 『⁠오인된 정체성』을 읽었다.

아사드 하이더의 『오인된 정체성』 책과 유리 서버에 담긴 커피가 나무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차별에 맞서는 운동에서 정체성 정치가 과연 효과적인 수단일지를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책의 출간은 참 반갑다. 무엇보다 차별에 분명하게 맞서는 좌파적 입장에서 정체성 정치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반가운 책이다. 이런 책을 읽을 때 고민하고 배우는 게 많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다르게 풀어내는가를 살펴보면서 읽게 된다.

‘정체성 정치’는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데, 심지어 우파도 ‘백인 정체성’ 운운하며 정체성 정치를 활용하기도 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하는 정체성 정치는 기본적으로 ‘좌파적’ 버전, 즉 차별받는 집단이 자신들의 특수한 정체성에 기초해 싸우겠다는 운동의 전략·조직 방식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기에 모든 정체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숨기며, 따라서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는 것으로 그 목표가 환원되기 쉬우며 집단적 자기 조직화의 가능성을 약화시킨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개인 정체성을 유행시키고 다른 이들의 정체성들을 감시하는 것 이외에 정치적인 실천은 있을 수 없다.

112-113쪽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 ‘반란자적 보편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인데, 이를 위한 전략이 모호하다는 게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반란자적 보편성’을 만들어낼 “프로그램과 전략, 전술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며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끝맺는다.)

내가 보기에 이는 저자가 계급(착취)과 차별의 관계에 대해 입장이 모호하다는 것과 연결돼 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인종과 계급 중 어느 것이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 어느 쪽도 정치의 토대가 될 수는 없다”라고 밝힌다. 어떤 것이 더 중심적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환원론이 될 것을 경계하는 듯한데, 이해할 만한 측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모호한 입장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인정하듯 보편적 해방을 위해서 반자본주의가 필수적이라면, 그러한 반자본주의적 투쟁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가능성을 고민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곧 ‘계급환원론’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는 저자가 84-85쪽에서 인용한 노엘 이그나티에프와 시어도어 앨런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백인 쇼비니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백인 노동자들을 주로 겨냥한 부르주아의 독으로, 지배계급에 의해 흑인 및 백인 노동자들을 종속시키는 무기로 활용된다. 그것은 백인우월주의라는 관행에 그 물질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이 관행은 단순히 비백인만 아니라 전체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해 저지른 범죄이다. 그러므로 백인우월주의의 철폐는 명백히 전체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요구 중 하나가 될 자격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추악한 관행이 역사적으로 미국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저지하는 데 했던 역할을 고려할 때,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은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중심적인 당면 과제가 된다.

저자는 ‘계급이 인종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이면 전부 ‘환원론’이라고 의심하는 듯한데(90쪽), 이는 저자가 계급을 ‘관계’로 보는 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제프리 디스티 크로익스가 지적했듯 “계급은 사회 구조 안에 착취가 반영되는 방식”이다.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라는 관계 속에서 계급이 존재한다. 그러나 착취는 균등하게 작동하지 않고, 인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자 차별 등 온갖 차별을 통해 불균등하게 작동한다. 그리고 이그나티에프와 앨런이 통찰하듯 착취하는 계급(지배계급)은 이러한 차별을 통해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 노동계급도 종속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종과 계급을 대립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동시에 더 나아가 “더 깊은 의미에서[는] 계급은 인종을 압도”(알렉스 캘리니코스)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주장을 ‘계급환원론’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그런 비판이야말로 조야한 환원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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