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가 약한 ‘문해력 위기론’

지난 3월 11일에 ‘주말에 EBS 〈⁠당신의 문해력〉 프로그램을 한번 봐야겠다’고 말했는데, 그 주 주말에는 못 봤고 어제부터 보기 시작했다. 아직 1화밖에 못 봤지만, 내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을 감수하더라도 좀 강하게 표현하자면 약간 ‘사기’당한 기분이긴 하다.

일단 적어도 1화에는 중고등학생이 주로 나오며, 중고등학생이 아니더라도 젊은 사람들의 문해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통계상으로 볼 때 한국에서 젊은 사람들의 문해력이 특별히 나쁘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PISA 2018년 조사에서 만 15세 한국 청소년 읽기 평균 점수는 OECD 국가 중 다섯 번째로 높다. OECD 평균 점수는 487점이고 한국은 514점이다. 에스토니아, 캐나다, 핀란드,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수의 OECD 국가 청소년 읽기 점수가 한국보다 아래에 있다. “그렇지만 읽기 점수가 계속 하락한다지 않소?”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한국의 읽기 점수는 2006년 556점에서 2018년 514점으로 하락했다. 하지만 순위는 여전히 상위권이다. OECD 회원국 읽기 점수 평균 역시 2015년 493점에서 2018년 487점으로 하락했다. 반면 한국은 동기간 517점에서 514점으로 하락폭이 더 적다.

한국인 문해력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은 젊은 세대의 문해력은 높지만 55세~65세의 문해력은 아주 낮다. 고로 세대 간 문해력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그 결과 문해력 평균 OECD 중위권이란 점수가 나온 것인데, 세대 간 문해력 간극을 지적한다면 유의미한 사회비평으로 이어질 수 있겠으나, ‘한국인 문해력이 낮다’고 말한다면 부정확한 명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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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유념해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설 한 가지는, ‘문해력에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아직 그 부분은 1화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는데, 그런 가설이 생각나게 만드는 자료는 두 번 나왔다.

EBS 〈당신의 문해력〉 화면. 전국 중3 2,405명의 문해력 평가 결과로 초과 수준 38%, 적정 수준 35%, 미달 수준 27%를 보여 주는 도넛 그래프
EBS 〈당신의 문해력〉 화면. PISA 읽기 하위성취 비율이 2000년 5.7에서 2018년 15.1로 늘어난 선 그래프와 ‘실제로 읽기 부진 18년 사이 3배 가까이 증가’ 자막

그런데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책을 1년에 70권씩 읽는 그룹과 1년에 1권 읽을까 말까 한 그룹의 뇌 사진을 비교하는 장면이 있는데, 책을 많이 읽는 그룹은 전전두엽이 더 활성화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화면을 잘 보면 책을 안 읽는 그룹이 더 활성화돼 있는 부위가 있다.

EBS 〈당신의 문해력〉 화면. ‘많이 읽는다’와 ‘안 읽는다’ 두 그룹의 뇌 활성화 사진을 나란히 놓고 한쪽 부위를 붉은 원으로 표시한 모습
EBS 〈당신의 문해력〉 화면. 같은 뇌 사진 아래에 ‘책을 많이 읽을수록 전전두엽 활성화’ 자막이 달려 있고, ‘안 읽는다’ 쪽 뇌의 아래쪽 부위가 붉게 표시된 모습

저 부위는 뭐고 무엇을 주로 담당하는 건지는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넘어간다. 사람마다 많이 쓰는 뇌 부위가 서로 다를 수 있고, 그건 뇌의 ‘스타일’이 서로 다른 것 아닌가? 모두가 전전두엽을 다른 부위보다 더 많이 쓰는 게 꼭 좋은 걸까?

사실 나는 영상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1년에 보는 영화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다. 일단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좀이 쑤시고, 제대로 이해를 못 하고 넘어간 것 같은 장면이 있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보다가 집중이 안 되면 멈췄다가 나중에 보려 한다.

그러니까 영화관에 잘 가지 않으려 하고, 그나마 집에서 영화를 종종 봐서 1년에 다섯 편 정도는 보는 것이다. 집에서 보면 재생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고, 30초 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넘어갔다가 할 수도 있고, 보다가 중간에 멈춰 놨다가 며칠 후에 다시 보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책이라는 매체, 특히 종이책이라는 매체가 편하다. 종이책은 이 모든 것을 전부 편하게 할 수 있다. 내 집중력에 맞춰서 볼 수가 있고, 집중이 안 된다 싶으면 덮어 놨다가 나중에 봐도 되고(심지어 1년 후에 다시 펴봐도 되고), 이해를 못 했으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도 상관이 없다. (여담이지만 전자책은 그런 점에서 약간 불편하다. 영상만큼은 아니지만.)

아무튼 〈⁠당신의 문해력〉 1화도 그런 식으로 봤다. 재생속도를 1.5배속으로 했다가, 다시 1배속으로 했다가,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넘겼다가…. 하지만 이런 방식은 보통 영상을 ‘잘’ 본다고 여겨지진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 사회에서는 영상을 잘 보든 못 보든 그다지 그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사실 어쩌면 ‘문해력’ 문제도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 의심도 약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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